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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Sep 21. 2020

실패한 여행의 기억

성공과 실패의 영역에서 보는 지난 뉴욕 여행

코로나 19가 장기화되면서 어쩔 수 없이 마지막 해외여행을 생각하게 된다. 당분간 떠날 수 없게 된 해외여행의 아쉬움은 자연스레 지난 여행에서 있었던 아쉬움과 행복을 상기시킨다. 마치 끝나버린 연애를 복기하며 후회를 끊임없이 떠올리듯이.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여행에도 일종의 성공한 여행과 실패한 여행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여행은 지나고 보면 결국 좋았던 점만을 남겼지만, 그렇다고 그 여행이 성공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성공과 실패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난 2018년 연말의 뉴욕 여행은 철저히 실패의 영역에 가까웠다. 즐거운 순간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곳에서 나는 절망스러울 정도의 무기력과 우울감만을 느꼈을 뿐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내가 담은 사진 속 뉴욕의 풍경들은 몇 년이 지난 지금 내 눈길을 강하게 잡아끈다. 코로나로 인해 여행이 어려워지기 전 떠난 마지막 여행이 실패한 여행으로 기억된다는 건 꽤나 속 쓰린 일이다. 

사실 대부분의 여행은 성공보다도 실패의 기록을 남긴다. 이것 역시 연애와 여행의 비슷한 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내게 있어 지난 모든 일들은 일정 정도 실패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 머릿속엔 이러한 실패의 기록이 망령처럼 떠돌아다닌다. 여행의 찬란했던 순간은 이 망령들에 뒤엉켜 잠식된 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희미해진다. 여행은 사실 실패하려 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같은 기억들은 '모든 기억은 희미해진다'는 오랜 격언의 도움을 받아 점점 퇴색된다. 이 역시도 연애와 비슷하다. 한차례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난 여행자의 마음속엔 불분명한 덩어리로 이루어진 실패의 경험과 어렴풋한 좌절의 감정만이 남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지난 여행의 기억이 숙성되고 나면, 지난 실패의 기억은 개인에게 일종의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가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그런 종류의 도전의식과 다짐들을 말이다.


내게는 처참하게 실패해버린 첫 파리 여행이 그랬는데, 그 도시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땐 오히려 첫인상의 부정적인 감정이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머릿속엔 두 번째 여행의 강렬하고 아름다운 기억이 첫 번째 여행의 기억을 지우며 자리 잡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에서의 긍정적인 감정은 대체로 부정적인 감정을 압도하며 다가온다. 성공적이었던 여행과 도시는 한 번 다녀온 뒤로는 오히려 잘 생각나질 않을 뿐 아니라, 다시 갈 마음이 쉽사리 들질 않는다. 완벽한 기억을 두 번째 방문으로 망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반면에 실패한 여행의 경우 기분 나쁘게 자리한 실패의 경험을 두 번째 도전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도전의식이 마음 한편에 싹튼다. 그러고 보니 이 역시도 연애와 일종의 맥락을 같이 한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연애는 같은 대상과의 두 번째 경험에서 더 부정적인 기억을 남긴다는 것 정도다.


아무튼 그렇게 좋다던 뉴욕이 내게는 처참히 실패한 여행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오랜만에 혼자 떠난 여행은 외로웠다. 세계의 중심이라는 도시 속에는 차가움만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어디에서도 내가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발이 퉁퉁 부어라 돌아다녔던 미술관의 기억과, 에이스 호텔 방 한 구석에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미국 라디오를 틀어놓은 채 감기에 시달리며 홀짝이던 맥주만이 역설적이게도 나를 위로해주었다. 외로운 도시에서 나는 더 고독과 외로움 속으로 침잠해갔을 때 비로소 '뉴요커'다운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오고 난 뒤, 돈이 많거나 아주 행복해지기 전까지는 뉴욕을 다시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뉴욕은 철저히 자본의 도시였다. 뉴욕은 자본가의 지상낙원처럼 느껴졌다. 만약 그 두 번째 뉴욕 여행이 다가왔을 때, 과연 파리에서의 경험처럼 실패의 감정이 긍정적으로 작용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파리 역시 뉴욕의 첫인상과 비슷했지만, 두 번째 여행에서는 오히려 기대를 버리고 간 탓인지 훨씬 더 즐거웠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갈 생각이 없는 도시였으나, 강제적으로 갈 수 없게 되자 생각나는 여행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뉴욕이었다. 외롭고 차가운 도시를 밝히는 어둑한 조명들. 쓸쓸한 크리스마스의 여행자. 가끔은 그때의 그 외로움이 사무치게 기억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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