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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Sep 18. 2020

실은 여행이 아니고 도피

여행을 떠나던 마음

이제와 생각해보면 혼자 떠나는 여행이란 내게 도피의 다른 말이기도 했다.


혼자 떠난 첫 여행은 2010년의 내일로 여행이었다. 당시 나는 군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병역기피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답답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여행밖에 없었다. 대리만족의 성격이 짙은 도피였다. 2010년은 스마트폰이 보급되기도 전이었다. 덕분에 나는 PC가 보일 때마다 자료를 수집하기에 급급했다. 각 지역의 피시방과 찜질방에서 온갖 정보를 검색해 프린트한 뒤, 현지에서 물어물어 장소를 찾아다녔다. 지금처럼 손바닥만 한 작은 화면에 gps가 포함된 지도를 참고하며 어디든 갈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대중교통을 어디서 어떻게 이용해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지까지 사전에 미리 찾아두었다. 그렇게 전주, 광주, 여수, 순천 등을 여행했다. 내가 스마트폰을 쓰지 않은 최초이자 마지막 여행이었다.


두 번째도 내일로를 이용한 여행이었다. 인턴생활이 막 끝난 2014년의 여름이었다.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힘들어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회사를 나갈 때는 그래도 출근과 퇴근이 반복되는 정신없는 일상 덕에 감정을 돌볼 여유가 없었는데, 인턴이 끝나자 넘쳐나는 시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미련하게 과거 속에서 질척대는 일뿐이었다. 생각의 끝은 늘 후회였다. 그런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당장 내일로 티켓을 끊었다. 바로 다음날 떠나는 티켓이었다. 다행히 2010년과는 달리 내게는 스마트폰이 있었다. 핸드폰에 의지한 채 기차에 몸을 싣고 아무렇게나 돌아다녔다. 2010년에 갔던 장소도 있었고, 처음 가보는 곳도 있었다.


첫 해외여행도 2014년에 떠났다. 장소는 유럽이었다. 2014년 연말에 출국해서 2015년 초에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졸업이 다가오고 있던 시기였고, 불투명한 미래가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지난 연애는 계속해서 나를 힘들게 했다. 역시나 나는 현실에서 도피했다. 늘 보던 사람들, 늘 가던 장소에서 벗어나 아주 먼 곳으로 떠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나는 여전히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나마 이 첫 여행이 마냥 현실에서의 도피가 되지 않은 건, 그 여행을 계기로 브런치에 글을 쓰고 그 내용으로 책을 냈기 때문이었다.

취직을 하고 나서는 명절을 피해 떠났다. 그 시기의 여행은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가족문화에 대한 악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해외여행 티켓을 끊으면 아버지도 나를 큰집에 데려갈 순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걸 핑계로 체코와 오스트리아의 풍경을 보고 왔다. 명절을 피해 떠난 외국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가족을 생각했다.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친척 말고, 한 집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 가족.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을 떠올렸다.


이후 몇 년 간은 늘 동행이 있는 여행을 다녔다. 퇴사 후엔 엄마와 함께 유럽여행을 떠났고, 2017년엔 사람들을 모아 몽골로 여행을 갔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는 제주도에 살았으므로 사실상 여행자의 신분이나 다름없는 시기를 보냈다. 명절에 해외여행을 핑계 댈 필요도 없는 시절이었다. "추석 비행기표가 비싸서 그다음 주에 갈게요"하면 그만이었다.


최근 떠난 마지막 해외여행은 2018년의 미국 여행이었다. 이미 예정된 여행이었으나, 어쩌다 보니 퇴사 후 떠난 두 번째 여행이 되었다. 역시나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는 시기의 여행이었다. 앞날이 불투명했고,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날들이었다.

이렇게 자연스레 지난 여행들을 돌아보며 그때의 내 기분도 떠올리게 되었다. 여행이 필요한 시기는 언제였을까, 그렇다면 그때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부정할 수 없이 모든 원인은 결국 도피에 있었다. 여행이란 결국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비일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다. 쳇바퀴처럼 똑같은 일상,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 외면하고 싶은 상황들. 저마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여행이란 현실에서 나를 둘러싼 모든 일로부터 떨어져 잠깐이라도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손쉽고도 효과적인 행위다. 도피를 통해 추진력을 얻고 또다시 지난한 일상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일. 우리가 다디단 마카롱을 매일 먹지 않으니 맛있고 특별하게 느끼는 것처럼, 여행이란 일상에 달콤함이 필요할 때마다 생각나는 마카롱 같은 무언가가 아닐까.


아, 여행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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