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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Oct 23. 2020

여행자의 향수

여행지에 향수를 새겨 넣는 일

처음으로 나만의 향수를 가진 건 2013년 가을이었다. 내가 고른 건 디올의 화렌하이트라는 향수였다. 나에게는 묘하게 홍시 냄새 비슷한 향이 나면서도 너무 무겁지 않은 향이었다(그 향이 만다린과 바이올렛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당시 고민하던 샤넬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파우더리 한 향이 덜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향수를 쓰기로 마음먹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향수에 환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향수를 뿌린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철저한 자기 관리, 아침마다 손목에 향수를 칙-하고 뿌리는 그럴싸한 남자. 매력 넘치는 이성이 되기 위해서는 향수 정도는 뿌려줘야 할 것 같았다.


그 이후로 향수의 세계에 빠진 나는 틈 날 때마다 향수를 사들였다. 지금까지 샘플을 포함해 써 본 향수만 마흔 개가 넘고, 갖고 있는 향수만 해도 대략 열 가지 정도가 된다. 이 중에는 여행 중에 산 향수가 절반이 넘는다. 펜할리곤스의 엔디미온, 산타마리아 노벨라 무스치오, 조 말론 우드 세이지 앤 시 솔트, 딥티크의 필로시코스, 톰 포드의 네롤리 포르토피노 등. 대다수는 내가 여행했던 도시를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인 향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이 향수들을 통해 지난 여행을 떠올린다. 오늘은 이 중 몇 가지만 이야기해 볼까 한다.

처음 여행에서 산 향수는 펜할리곤스의 엔디미온이었다. 2014년 12월, 크리스마스 박싱데이로 떠들썩하던 런던의 코벤트 가든 펜할리곤스 매장을 들러 구입했다. 당시엔 지금보다 향수에 대한 경험도 적고 지식도 없던 시기였다. 때문에 쭈뼛쭈뼛 들어가 점원이 추천해준 한 두 개 정도의 향수만 시향 해본 뒤 구매를 결정했다. 엔디미온의 향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좀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엔디미온 향을 뿌리면, 런던의 활기찬 크리스마스 풍경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때부터 여행에서 향수를 하나씩 사 오는 습관이 생겼던 것 같다. 그러나 엔디미온 같은 느낌의 향수를 전후로 구입한 적은 없다. 엔디미온은 파우더리 하면서도 스파이시한 느낌이 강한 향수다. 이름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의 미남 목동 엔디미온 같은 사람에게 어울릴법한 부드러운 이미지의 향수다(나는 아니다).

두 번째 향수는 딥티크의 필로시코스다. 이 향수는 어머니와 함께 유럽여행을 다니던 2016년 겨울, 파리에서 스페인으로 건너가기 위해 샤를 드 골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구매했다. 딥티크의 향수를 하나 정도 구매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마침 공항 면세점에서 딥티크 매장이 보여 바로 들어가서 구매한 향수다.


당시를 회상하면, 먼저 시향 한 탐다오의 향이 너무 괴상망측한 나머지 화들짝 놀란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지금이야 우디하고 마이너 한 향도 어느 정도는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때는 머스크 계열이나 시트러스 정도만 찾던 시절이었다. 탐다오는 소위 말하는 절간 냄새, 그러니까 사람에게서 날 것 같지 않은 냄새가 났다. 맡자마자 재채기가 나올 정도의 매운 향이었다.


탐다오 다음으로 필로시코스 향을 맡게 되었는데, 이전에 맡은 탐다오의 향이 너무 세서 그랬는지 필로시코스의 향은 맡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렸다. 나는 주로 사람이 아닌 향수에게 첫눈에 반하곤 하는데, 필로시코스나 엔디미온, 오드 세이지 앤 시 솔트가 그런 향수였다.


아무튼 필로시코스의 향을 맡자마자 다른 향수는 시향 할 생각이 안 날 정도로 너무 좋았고, 바로 직원에게 하나 달라고 한 뒤 쿨하게 구매했다. 지금까지도 필로시코스는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내 최애 향수다. 적당히 달달한 무화과 향과 딥티크 향조 특유의 시원한 풀향이 섞여 뿌리고 나면 기분이 환기되는 느낌이 든다. 대다수의 향수 브랜드가 파리를 베이스로 삼고 있으나, 파리 여행에서 사서 그런지 내게는 딥티크=파리라는 공식이 더욱 깊게 뿌리내렸다. 마음에 환기가 필요할 때마다 나는 필로시코스를 뿌린다.

마지막은 코로나 19가 창궐하기 전, 마지막일 줄 모르고 떠난 해외여행이었던 뉴욕-미국 여행에서 산 톰 포드의 네롤리 포르토피노다. 이 향수는 미국에서 산 것은 아니고 출국 전에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구입한 향수다.


솔직히 말해서 이 향수를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비행시간까지 시간이 남아서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차에 평소 잘 쓰고 있던 톰 포드의 화이트 스웨이드가 생각나 톰 포드 매장을 들어갔다가 만난 향수였다. 뿌리자마자 상큼한 만다린(귤)향이 확 퍼지는데, 파란 병과 포르토피노라는 이름에 잘 어울리는 여름 향수라는 생각이 진하게 들었다. 평소 시트러스 한 향을 좋아하지만 뻔한 시트러스 향을 싫어하는 내게는 톰포드 특유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향조가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역시 구매.


나는 이 향수를 크리스마스 시즌의 뉴욕에서 뿌리고 다녔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상쾌함을 느끼는 것처럼, 가끔 겨울에 여름 향수라 불리는 시트러스 향의 가벼운 향들을 뿌리는 즐거움은 아는 사람만 안다. 겨울 이불속에서 전기장판을 켜놓고 귤을 먹으면 그것보다 더 상쾌한 경험이 있던가? 그렇게 톰 포드의 네롤리 포르토피노 향을 뿌린 채 뉴욕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밖에도 피렌체에서 산 산타마리아 노벨라 향수나, 제주도 면세점에서 샀던 조 말론 우드 세이지 앤 시 솔트 등 여행을 다니며 다양한 종류의 향수를 샀고, 또 뿌리고 다녔다. 이렇게 주절주절 길게 여행지와 향수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여행지에서 사는 향수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쉽게 그 여행의 기억을 서울 한복판에서도 불러올 수 있는 매개이기 때문이다. 여행지를 기념하기 위해 마그넷이나 스노볼 등을 사는 것도 좋지만, 향수를 하나 산다면 그 향수를 뿌릴 때마다 그 여행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나는 주로 겨울에 여행을 다닌 탓에 나는 날씨가 쌀쌀해지면 다양한 향수를 뿌리며 여행의 기억을 되살려보곤 한다.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나던 코번트 가든의 엔디미온, MoMA에서 미술작품에 빠져있던 나와 톰 포드 네롤리 포르토피노, 샤를 드 골 공항의 필로시코스 등등. 내게 향수란 특정 도시를 가장 강렬하게 떠올리게 하는 수단이다.


향수에는 원래 성별의 구분이 없었고, 어떤 특정 이미지 역시 명확히 구분 지어진 것도 아니었다. 향수마다 이미지가 있다 하더라도, 결국 한 개인의 기억으로 연상되는 강렬한 이미지에 비할 것은 못된다. 내게 향수란 특정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기보다는 여행과 도시를 생각나게 하는 물건이다. 특정 도시마다 나만의 향수를 새겨 넣는 일. 그런 의미에서도 나는 여행이 즐겁다. 다음 여행지에는 어떤 향수를 새겨 넣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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