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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Oct 18. 2020

눅눅한 파리, 비의 냄새

새벽 세 시 이십 분, 창문을 열자 차가워진 밤공기에 눅눅한 냄새가 섞여났다. 비 냄새였다. 평소보다 유난히 또렷이 느껴진 비 냄새는 나를 익숙한 기억 속으로 내던졌다. 파리에서의 기억이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Emily in Paris>를 보고 난 뒤여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파리는 눅눅한 비의 냄새로 기억되는 도시다. 첫 파리 여행의 사흘째 되던 날은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기에는 애매한 비였다. 파리지앵들을 보니 다들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 비를 맞고 있었고, 나도 그들을 따라 비를 맞으며 걸었다. 툭툭 무심히 비를 털어내며 걷다가 빗방울이 굵어진다 싶으면 근처 카페나 미술관을 찾아 들어갔다. 걷다가 무작정 카페나 미술관을 찾아 들어갈 수 있는 도시라니. 아무튼 그 날은 도시 전체에서 비 냄새가 났다. 눅눅한 그 냄새는 내가 파리에 도착해 내내 맡았던 그 도시의 체취를 더욱더 도드라지게 했다.

겨울의 차갑고 눅눅한 비 냄새. 파리는 이런 감각들이 주는 정취와 퍽 잘 어울리는 도시다. 적당히 회색빛이 섞인 파리의 풍경과, 도시를 뒤덮은 눅눅한 냄새. 퀴퀴하거나 꿉꿉한 냄새라기보다는 사람을 착 가라앉게 만드는 전형적인 도시의 차가운 냄새. <파리의 우울>을 쓴 샤를 보들레르는 아마 이 도시의 영혼을 꿰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이제는 언제 가게 될지도 모르는 파리의 냄새를 비가 오는 서울에서 느꼈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파리에서 내가 맡은 것은 비가 내리는 메트로 폴리탄의 냄새였다. 도시인의 우울이라는 감정의 정수가 담긴 그 냄새. 홀로 외로이 걷던 1월 3일의 파리 골목길. 나는 그 뒤로도 파리에 갈 때마다 늘 비 냄새를 맡았다.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도시에선 비 오는 날의 눅눅한 아스팔트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때로 어떤 냄새는 강렬한 기억의 촉매제가 되어 우리를 먼 곳으로 떠나보낸다. 내게 파리란 눅눅한 아스팔트 향이 피어오르던 비 오는 날의 냄새로 기억되고 있다는 걸 어느 날 비 오는 새벽에 깨달았다.


그날 비가 내리던 파리는 날이 개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때로 여행에선 비 오는 날씨를 만나도 좋다는 것을 그날의 경험에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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