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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Oct 07. 2020

약 8,960km

집으로 가는 길에 괜스레 감상에 젖게 되는 날이 있다. 이상하게도 그런 감정은 꼭 딱히 힘든 일이랄 것도 없었던 날에 찾아온다. 회사를 다니는 중에는 야근도 없고 심지어는 일도 잘 풀리는 날이 특히 그랬다. 그런 날이면 연락처의 목록을 의미 없이 스크롤로 왔다 갔다 하다가, 오갈 데 없는 이 마음을 풀어놓을 곳이 딱히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습관적으로 SNS를 켠다. 그곳엔 늘 잘 찍힌 다른 도시의 사진이 가득하다. 세계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된 지금도 사람들은 과거 언젠가 방문했던 장소의 사진들을 올린다. 마침 누군가 올린 파리의 에펠탑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처음으로 파리를 여행했던 날을 떠올렸다.


파리에 도착한 첫날, 누구나 그렇듯 나는 에펠탑으로 먼저 달려갔다. 밤이 늦은 시간이었고,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비르하켐 다리에서 에펠탑을 보자마자 나는 속수무책으로 에펠탑과 이 도시에 사랑에 빠지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그 뒤로 파리에 머물렀던 시간 동안 에펠탑을 보지 않은 날이 없었다. 늘 거대한 철골구조의 랜드마크를 보며 하루를 시작하거나 마무리했다. 조금은 촌스럽다고 느끼면서도 에펠탑만이 주는 그 마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별 것 아닌 철탑, 심지어 옛 파리지앵들은 혐오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다는 그 상징물이 좋았다. 거기엔 에펠탑 만이 낼 수 있는 파리 특유의 감성이 있었다. 역시 사람들이 많이 가는 데에는 이유가 다 있었다.


에펠탑은 꿈에 그리던 도시에 왔다는 뿌듯함과 설렘, 두려움 등으로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얽힌 감정을 뱉어내곤 하던 곳이었다. 내게는 파리의 또 다른 이름이자, 서울과 파리 사이의 거리 약 8,960km를 상징했다. 약 8,960km. 그건 서울에서 파리까지의 거리다. 보통 부산에서 서울까지를 325km로 계산하니까, 그 거리의 스물일곱 배 정도 되는 셈이다.

여행에서 가끔 내가 얼마나 현실로부터 멀리 벗어났는지 실감이 나지 않을 때면, 물리적인 거리를 떠올린다. 냉혹하고 직접적인 수치만큼이나 효과적인 수단이 없었다. 거대한 숫자의 의미 없는 나열은 내가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줬다. 숫자라는 완전무결한 세계 속의 논리로부터 내가 현실로부터 완벽히 멀리 떨어졌다는 것을 인정받고 나면, 그제야 다시금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아, 그래. 여기는 지금 파리 한복판이지.'


그걸 깨닫고 나면 서울에서도 흔하게 보이던 가로등 불빛과 자동차들, 노을이 지는 하늘과 도시를 밝힌 건물의 불빛들이 8,960km를 건너온 이 도시에서는 전혀 다른 감상으로 다가온다. 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사람들은 나와 똑같이 살아가고 나 역시 하나도 변한 것은 없지만,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내 삶의 무대가 완전히 바뀌어버린 듯한 느낌. 꿈같으면서도 연극적인 순간은 오로지 8,960이라는 숫자로부터 현실성을 부여받는다. 삶을 가장 손쉬우면서도 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 마법, 그게 우리가 늘 먼 곳으로의 여행을 떠나는 이유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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