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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Oct 06. 2020

내가 런던에 있었을 때

커피, 엔디미온, 그리고 새벽 공기

천성적으로 더위를 많이 타는 나는 대부분의 여행을 겨울에 떠난다. 추위를 잘 타지 않아서 한 겨울에도 패딩류의 옷을 입지 않는 내게 겨울은 여행하기에 최적의 시기다. 그래선지 유난히 공기가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무렵부터 지난 여행의 기억들이 떠오르고, 여행에 대한 그리움이 커진다.


마침 추석 연휴가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밤공기가 쌀쌀해졌다. 창문을 열고 새벽 세시에 차가워진 공기를 쐬고 있다가, 문득 처음 떠난 유럽여행의 기억이 속수무책으로 밀어닥쳤다.


처음으로 떠난 유럽여행에서 가장 먼저 도착한 도시는 영국 런던이었다. 나는 이제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맡으면 숙소였던 리치먼드 근처의 어둑한 새벽 거리가 떠오른다. 채도가 짙은 주황색 가로등이 깔려 있던 골목길에는 파랗게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해 아침 일찍 일어났던 내가 처음으로 보았던 유럽의 길거리 모습이었다.

그 뒤로 몇 차례의 유럽여행을 떠난 뒤, 유럽의 골목길은 대체로 비슷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날 내가 새벽 공기에서 맡았던 냄새만큼은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난다. 시원한 겨울의 공기가 파란색의 새벽빛에 더 진하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런던의 매캐한 매연이 살짝 섞여 있는 그 공기가 내게는 한없이 청량하게 느껴졌다. 주섬주섬 코트를 입고 워털루 역으로 향하던 그날 아침의 벅찬 감동을 여전히 잊을 수 없다. "아, 내가 드디어 유럽에 왔구나."

첫 번째 기억이라는 탓인지, 런던이라는 도시 자체가 너무 좋았던 탓인지 날씨가 조금만 쌀쌀해지면 어둑했던 리치먼드의 골목길이 생각난다. 그렇게 눈을 감고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으면 어디선가 차가워진 공기를 타고 런던의 향이 솔솔 불어오는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여행을 강렬하게 기억하게 해주는 기억은 의외로 하드를 가득 채운 사진이 아닌 코끝을 스쳤던 향에서 온다. 내게 런던은 히드로 공항의 Costa에서 흘러나오던 고소한 커피 향과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 코번트 가든에서 산 펜할리곤스 엔디미온, 그리고 파란색과 짙은 주황색이 섞여 있던 차가운 새벽 공기의 냄새로 기억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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