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욱 Nov 10. 2015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일

4년 만에 다시 홀로 떠난 내일로 여행 (2014년)

4일


여행의 피로와 전날의 늦잠이 결국 여행 4일차 되던 날 아침 터져버렸다. 일어나서 창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나는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 일어났다 다시 잠들기를 몇 번, 일어나니 시간은 한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서로에게 이제 슬슬 일어나자는 신호를 보내며 한 시간씩이나 밍기적거렸다. 아침에 이런 모습은 우리가 항상 보아오던 서로의 모습 그대로였다. 고등학교 시절 서로의 집에서 놀던 날의 우리가 그랬고, 2년 전에 떠났던 자전거여행에서도 우리는 그랬다. 그 모습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오후 늦게 일어난 우리는 친구가 추천하는 막국수집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어차피 4일차부터의 일정을 제대로 잡아놓지 않은 상태였고, 비도 계속 오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하고 있었으므로 오늘 하루는 조금 쉬기로 결정하고 막국수를 먹으러 향했다. 친구의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던 식당에 택시를 타고 가서 막국수를 먹었는데 식당은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서인지 우리 말고는 가족끼리 온 듯한 한 무리의 손님밖에 없었다.

가볍게 막국수를 먹은 우리는 올 때 택시를 탔던 것과는 달리 날씨도 선선해서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걸어가며 친구가 공부하고 있는 강릉대 치과대학의 건물도 보고, 평창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쓰이게 될 선수기숙사를 짓고 있는 건축현장의 모습도 보며 20분여를 걸어 집에 도착했다. 비는 그쳤고, 친구는 과외를 하러 가야 했기에 나도 어디론가 일단 가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해야했다. 친구에게는 하루 더 신세를 지기로 이미 얘기를 해 놓은 상태였기에 숙소에 대한 부담은 없었지만, 기차를 타고 어디를 가든지 오늘은 강릉으로 다시 돌아와야했다. 그렇게 나는 강릉에서 가장 가까운 곳인 묵호항으로 향했다.


햇살이 뜨겁건 비가 오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배가 고프고, 다리가 아프고, 때론 길을 잃어도 이곳이 서울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마냥 좋은 거다.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내가 걱정할 일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현실도피를 즐기는 짜릿한 도망자가 되는거지. 낯선 곳에다 눈물 콧물 한숨 크게 뱉어버리고 나면 '자, 다시 현실로 들어갈 준비를 합시다'라고 어느새 나를 다독일 배짱이 충전되는...여행은 뭐, 그런거지 뭐.

- 박세연, 어떤날中 현실도피


묵호항부터의 일정은 정말 즉흥적인 여행이었다. 무턱대고 아무계획도 세우지 않은 상태로 우선 기차시간만 알아본 뒤 강릉역으로 향했다. 강릉역에서 묵호항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역을 천천히 둘러보는데, 내 눈을 의심케하는 안내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올해 2014년 9월 1일부로 강릉역이 리모델링을 위해 잠정적으로 폐쇄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 짤막한 몇 문장에 많은 생각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어릴적엔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어릴적부터 내가 살던 동네는 변화에 민감한 곳이 아니었으니 더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도 이사오기 전에 살았던 동네를 가보면 옛날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 놀라울 정도니까. 지금의 동네도 마찬가지다. 이 곳에서 산지 십년가까이 되어가지만 눈에 띄는 변화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집 앞의 고깃집이 횟집으로 바뀌고, 헬스장이 들어서고, 미용실의 이름이 바뀌는 등 조금씩 변한 것은 있었지만. 서울로 대학을 다니며 가장 많이 느꼈던 점은 서울은 변화가 매우 빠른 도시라는 점이었다. 대학생활을 한지 6년이 지난 지금, 내가 입학했던 2008년과 지금의 학교, 신촌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폭이 너무 좁아 걸으면 항상 사람들과 부딪히곤 했던 신촌거리는 대대적으로 공사를 하면서 친 보행자적인 곳으로 바뀌었고, 우리들이 주로 만나곤 했던 만남의 장소는 독수리약국이 아닌 백화점 앞으로 바뀌었으며(그래도 독약 혹은 대학약국 앞에서 아직도 종종 만나곤 한다), 자주 가던 식당, 술집 등 신촌 거리의 수 많은 가게들은 차마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중앙도서관은 군대를 다녀오자 무척 깔끔하게 바뀌었고 교내 방송국이 있었던 종합관 건물도, 문과대가 있는 외솔관도 입학할 당시의 모습에서 깔끔하게 리모델링되어 바뀌었다. 학교는 용재관을 결국 부수어버렸고, 인턴생활이 끝나고 오랜만에 돌아갈 학교에서는 백양로를 바꾸겠다며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언젠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씩 잃어가는게 늘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는 커가면서 그렇게 사라지는 것들에 익숙해지고 그것들을 추억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일거라고.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아마 산다는 것은 저렇게 내가 익숙했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사라지는 모습을 가슴 아프게 지켜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강릉역 폐쇄 안내문을 보자 다시 들었다. 강릉역은 내 첫 기차여행의 목적지였고, 첫 밤기차의 도착역이었으며, 친구들과 했던 첫 여행의 추억이 깃든 장소였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또 하나의 추억과 기억이 담긴 장소가 변해가고 있었다.


등대의 불빛이 어둠을 뚫고 지나갑니다. '불꽃이 튀지 않는 춤은 춤이 아니다'고 책 첫머리에 적어놓은 글을 봅니다. 십년이 지났습니다. 시와 사랑과 추억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눈물과 고통과 쓸쓸함의 깊이에 대해서 이제 생각해도 좋은 시간이 온 것입니다. 산이 바뀌고 물길이 바뀌어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시간의 길이 있습니다.

- 곽재구, 포구기행

강릉역에서 기차를 타고 도착한 묵호항은 조용했다. 어업을 생활터전으로 삼는 사람들이 사는 소규모 항구도시의 느낌이 물씬 났다. 목적지인 묵호항 등대와, 그 곳에 올라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논골담길을 향해 묵호시내를 천천히 걸어갔다. 걸어가는 길에 시내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들은 짭짤한 냄새의 건어물 집들이 쭉 늘어선 골목이었다. 그 곳을 지나고 있으니 평소엔 즐겨먹지도 않는 오징어에 맥주 한캔이 절로 생각났다.

건어물 거리에서 조금 더 걸어가니 묵호항이 보였고 그 옆에 있는 꽤 큰 규모의 어시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묵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터전이자 가장 많은 이야기가 담긴 곳이겠거니 하는 생각에 천천히 구경했다. 어시장은 활기찼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듯 보이는 상인들의 얼굴에는 많은 표정이 겹쳐져있었다. 그것은 고된 하루를 끝낸 홀가분함인듯도 했고, 삶의 애환이 가득한 모습이기도했다.

이젠 꽤 익숙해진 바다내음을 맡으며 얼마간 더 걸으니 논골담길이 나왔다. 그러니까 묵호등대 근처에 있는 마을에는 논골담길이 1,2,3 등등으로 갈라지는데, 이 길들을 통해 골목골목을 누비며 올라가다 보면 묵호등대가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가장 먼저 보인 논골1길을 통해 묵호등대로 올라가기로 했다. 결국 이 골목도 내가 부산에서 봤던 감천문화마을처럼 사람들이 사는 삶의 터전이 관광지가 된 셈이었다. 누군가 와서 그렸을 벽화들은 감천문화마을보다는 조금 정리되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불규칙함에서 오는 따뜻함이 있었다. 작은 규모의 마을에는 더 어울리는 벽화들이었다.

한참을 골목골목 누비고 있으니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어릴적 종종 놀러가서 보았던 외할머니댁의 골목길 모습이었다. 그 시절 보았던 마당의 장독대들, 그리고 빨랫줄에 걸려있는 빨래집게들이 있는 아련한 풍경이었다. 외갓집이 바닷가 근처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어버린 풍경들이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모습이 생각나 잠시 천천히 걷다가, 어딘가에 앉아 멍하니 그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할머니 몇 분이 집 안에서 도란도란 말씀을 나누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가만히 앉아있다가 다시 묵호등대를 보기 위해 골목길을 올라갔다. 막상 도착한 묵호등대에서 보는 묵호앞바다는 내가 상상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냥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의 모습이었다. 나름 꽤 큰 규모인 듯한 묵호항이 저 멀리 보였고,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해 하나 둘 불빛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묵호에서 나의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닷가가 아닌 골목길이었다.

내려올 때는 등대오름길이라는 곳으로 내려왔다. 등대에 오르기 위해 올라왔던 길보다 훨씬 더 오르기 쉽고 편하게 되어있는 길이었다. 천천히 내려왔는데도 훨씬 금방 내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강릉까지 다시 가기 위해 타야하는 기차시간도 아직 꽤 남아있었던 나는 충동적으로 다시 논골1길에 올랐다. 그곳에 올라 묵호시내에 어둠이 내려앉는 모습을 한참동안 쳐다봤다. 구불구불하게 얽혀있는 골목길 사이로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는 모습이 보였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에서도 불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고, 이야기가 있는 곳이었다. 내가 앉아있는 곳으로는 두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그 곳에 앉아 이 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었다.

그 길에서 내려온 뒤 묵호항 앞에 길게 펼쳐진 방파제를 따라 잠시 걸은 뒤 다시 묵호항으로 돌아왔다. 밤의 묵호항은 낮에 본 것과는 달리 사람이 없어 스산했다. 역으로 가는 길, 후미진 골목에선 낮에 볼 수 없었던 홍등가의 불빛이 보였다. 걸음을 재촉하며 묵호역에 도착해보니 역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는 듯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어깨너머로 구경한 뒤 역 앞 편의점에서 간단히 배고픔을 달래고 다시 기차에 올랐다.

4일차의 일정도 이렇게 끝이 났다. 어제 강릉으로 가기 위해 탔던 같은 시각의 밤기차를 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행이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길을 모르면 물으면 될 것이고, 길을 잃으면 헤매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늘 잊지 않는 마음이다. 그 곳을 향해 오늘도 한 걸음씩 걸어가려 한다. 끝까지 가려한다. 그래야 이 길로 이어진 다음 길이 보일 테니까.

- 한비야, 중국견문록

Copyright 2015. 정욱(framingtheworld) all rights reserved.  

매거진의 이전글 야간열차는 상처를 안은 채 달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