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욱 Jan 31. 2021

청포도 캔디와 나의 첫사랑

얼마 전, 회사에서 팀원들이 주문한 간식이 도착했다. 다양한 간식들 속에서 유난히 내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청포도 캔디였다. 청포도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쓰인 사탕 봉지와, 그 뒤로 그려진 청포도, 양 끄트머리의 녹색 포인트까지. 내 기억 속 청포도 캔디의 모습 그대로였다. 오랜만에 하나를 뜯어 입 속에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낯익은 단 맛이 혀를 감쌌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을 꼽자면, 그중에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다. 세계지리를 가르치셨던 담임 선생님은 내가 교무실에 갈 때마다 늘 본인의 책상 두 번째 서랍에서 청포도 캔디 하나를 주시곤 했다. 한 번 교무실에 방문하면 30분씩 수다를 떠는 것은 기본이었다. 나는 선생님과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고, 상담이라는 핑계로 교무실을 뻔질나게 드나들곤 했다. 그건 고등학교 3학년을 올라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나는 교무실을 좋아하는 다소 이상한 학생이 되어 있었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그랬듯 나 역시 처음부터 담임선생님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유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말이다. 내가 선생님을 좋아하게 된 계기 역시 뚜렷하지는 않은데, 아마 그 당시에 세계지리라는 과목을 꽤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고 짐작해본다. 나는 늘 먼 이국의 땅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고, 언젠가 꼭 비행기를 타고 먼 곳을 여행하고 싶어 했다. 그런 나에게 세계지리 시간은 유일하게 기다려지는 수업이었고, 덕분에 세계지리는 늘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유지했다. 학교 대표로 세계지리 올림피아드 대회를 나가기도 할 정도였다. 세계지리 과목에 대해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길게 했던 것이, 아마 내가 선생님을 좋아하게 됐던 이유가 됐던 것 같다.


그런 선생님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선생님이 뿌리던 겐조 향수 특유의 물향, 문화잡지 페이퍼와 성시경과 이동진에 대한 이야기, 컬러링이었던 탓에 지겹게 들었던 캐스커의 <고양이와 나>, 함께 봤던 영화 <원스>, 그리고 청포도 캔디와 어린 왕자.


나를 아는 사람이 저 위에 나열된 것들을 보면 알겠지만, 지금 내가 지닌 취향의 대부분은 저 시절에 빚지고 있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들을 같이 좋아하고 싶었다. 사랑의 아주 기본적인 호기심, 상대에 대한 관심, 함께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재료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의 선생님보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이 경험으로 나는 어린 시절 어떤 사람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됐다. 그녀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서, 내 외형적 이상형까지도 쌍꺼풀이 없는 사람으로 바꾸어버렸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도록 만드는 당신.


그래서 나는 선생님을 첫사랑이라고, 세월이 흐른 뒤에 결론 내렸다. 사람마다 첫사랑에 대한 기준은 각양각색이지만(처음 사귄 상대인가, 혹은 처음 좋아한 사람인가 등), 내가 생각한 첫사랑이란 '내 인생을 평생 바꿔 버린 상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첫사랑은 사랑을 하고 있는 당시가 아니라 시간이 흐른 뒤에라야 정의 내릴 수 있는 무엇이다.


문득 아직도 버리지 못한 세계지리 교과서와, 선생님과 주고 받았던 문자메시지와 편지, 녹음된 전화 파일 등을 뒤져봤다. 몇 개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지만, 여전히 몇 개는 서랍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치열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세계지리 교과서를 뒤적이며 청포도 캔디를 하나 까서 입에 넣었다.


오랜만에 먹은 청포도 캔디는 옛날과는 달리 사탕이 녹아도 날카롭게 변하면서 혓바닥을 상처 입히지 않았다. 상처 입지 않는 혓바닥에 나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기억 속 대상을 다시 만나도 똑같지는 않는구나, 어떤 것들은 이렇게 영영 사라지기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들을 하면서 청포도 캔디를 우물거렸다. 그리고는 슬쩍 청포도 캔디 몇 봉지를 두 번째 서랍에 넣어두었다. 가끔 아주 오래전 아련한 기억이 그리울 때면, 서랍에서 기억을 꺼내듯 청포도 캔디를 꺼내 먹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의 목적은 거창하지 않고, 삶은 마치 여행과 같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