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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Oct 16. 2023

회사의 생애 6화

뭉티기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으며,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뭉티기


해야 할 일은 많았고, 시간은 부족했다. 예견된 일이었다. 글로벌 자본 투자 유치를 위해서라는 납득할 수밖에 없는 대표의 납작한 이유를 바탕으로 본부 내 모든 사람들이 글로벌 앱 론칭에 몰두했다. 타운홀 미팅에서 보여준 최 대표의 의지는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어 보였고, 그걸 깨달은 우리는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방향으로 서비스 론칭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거의 일주일 동안 무수히 많은 미팅을 거쳤다. 회의실이 부족해서 회의를 잡지 못할 지경이었다. 미팅에서 뭔가를 결정하고 나면, 다음 미팅에선 또 다른 걸 결정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콘텐츠실은 영어, 일본어 등의 언어 구사에 능통한 구성원이 모여 있던 글로벌 팀과 합쳐졌다. 거기엔 미국과 캐나다에서 살다 온 유학생 둘과, 아예 국적이 일본인 직원이 있었다. 병합된 글로벌 팀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우리가 앞으로 론칭하게 될 국가들에 대한 리서치를 진행하는 일이었다. 그 자료를 토대로 우리는 어떤 나라에 집중해야 되는지 결정했고, 최종적으로 목표는 현실에 맞게 조정되어 85개국, 10개 언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100개국이나 85개국이나... 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업무를 해나가면서 인상적이었던 건, 이미 결정된 사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맡은 일을 해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속 마음이 '별 수 없어서'든, 진짜로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든 어쨌든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시간 속에서 어떻게든 해내기 위해 기획안을 쓰고, 디자인을 구상하고, 코드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런 게 회사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동시에 대규모의 채용도 진행되었다. 아무리 봐도 무슨 단어인지는 둘째치고 읽는 법 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 언어를 구사하는 나라에 앱을 론칭하기 위해선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실장이었던 연수님이 계속 면접을 진행하느라 정신없다는 말을 몇 주 동안 하더니, 어느 순간 베트남, 인도, 프랑스, 필리핀 등 다양한 나라의 현지인들이 채용되기 시작했고, 곧이어 이들을 관리하기 위한 글로벌 앱 경험을 가진 팀장도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글로벌 앱 론칭에서 콘텐츠실은 어느새 최전선에 서서 의사결정을 내리고 많은 이들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콘텐츠실이 그런 역할을 맡게 되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와 해린 님, 지민 님으로 구성된 콘텐츠팀은 나라별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작물을 조사하고 거기에 맞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번역을 맡기기에 바빴다. 그러는 와중에 우리 팀에도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한 직원을 채용해 업무를 진행했다. 그는 입사 첫날 소개에서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여기가 첫 직장이라고 했다.


12월은 매일이 전쟁 같은 날들이었다. 회사에 대한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불안감을 느낄 새 조차 없었다. 기한에 맞추기 위해서 할당된 콘텐츠 제작량이 있었고, 그러는 와중에도 국내 서비스를 완전히 손 놓을 순 없어서 틈날 때마다 농사랑 앱에 올릴 콘텐츠도 작성해야 했다. 국내 서비스는 해린 님이, 글로벌 앱 론칭은 지민 님이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둘 사이에서 그렇게 급하진 않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업무들을 빠르게 쳐내고 있었다. 내가 마케팅, 개발팀과 함께 전담하기로 되어 있었던 콘텐츠 검색엔진 최적화 파트는 뭔가 또 잘 해결되지 않았는지 마지막 미팅 이후로 이렇다 할 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글로벌 앱 론칭 막바지가 한창이던 1월 중순, 이제는 더 무슨 소문이 돌까 싶은 시점에 의욕을 완전히 꺾어버리는 소문 하나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글로벌 앱 론칭이 중단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소문의 진원지는 마케팅실 혜인 님과 승환 님이었다.


- 석준 님, 오늘 끝나고 뭉티기에 소주나 한 잔 ㄱ? 승환 님도 가기로 함.

- 아, 뭉티기 갑니까? 좋습니다. 10분 뒤에 보시죠.


퇴근이 임박했을 즈음, 혜인 님이 승환 님과 내가 함께 있는 슬랙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정신없이 업무를 쳐내느라 한 동안 소식이 뜸했던 그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케팅실은 글로벌 앱 진출로 5층 전체가 들썩이는 와중에도 상대적으로 잠잠했다. 아무래도 서비스가 나와야 마케팅을 할 테니까... 하고 넘겨버린 기억이었다.


"석준 님, 요즘 콘텐츠실 많이 바쁘죠?"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나기로 한 혜인 님이 나를 보자마자 근황을 물어왔다. 이상하게 이 회사에선 늘 만나는 사람마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라는 식으로 안부를 물어오곤 했다. 뭐랄까, 그런 인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언제 밥이나 한 끼 하자"와 같은 한국식 인사표현의 변주와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실제로 묻는 당사자와 진짜 식사를 하려는 의도가 아닌, 당신의 안위를 묻고 나와 당신의 친밀도를 유지하자는 의도의 인사말. 실제로 요즘 바쁘든 바쁘지 않든, 그 사실이 딱히 중요하진 않은 인사. 회사원에게 "요즘 한가하죠?"따위의 인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요즘 안 바쁜 팀이 어딨어요 다 바쁘죠 뭐. 글로벌이 뭐라고 어휴. 이거 보니까 제대로 굴러나 갈지 모르겠는데..."약간의 칭얼거림이 섞인 답변을 건네자 혜인 님이 알 수 없는 웃음을 띄워 보였다. "아, 뭉티기에 소주 한 잔 얼른 하고 싶네. 추운 날엔 역시 소주지! 가시죠 석준 님"


뭉티기집은 그전에도 이들과 두 어번 온 적이 있는 곳이었다. 승환 님의 강력한 의지로 추진되었던 그날의 메뉴였던 뭉티기는 승환 님이 아니라면 내가 생전 먹으러 갈 일이 없는 음식이었다. 새빨간 생고기를 다진 마늘과 매콤한 다대기가 섞인 장에 찍어 먹는 뭉티기는 평소 날 음식을 선호하지 않는 내가 내 의지로 먹을 일이 거의 0에 수렴하는 음식이었다.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함께 술자리를 가졌고, 그 술자리는 결국 셋은 모두 기억을 잃은 채 끝이 났다. 많은 얘기를 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술자리였다.


땡그랑-하는 종소리와 함께 식당에 들어선 우리는 자리 앉자마자 익숙하게 참이슬과 카스 한 병, 그리고 뭉티기와 곱창전골을 주문했다. 술은 주문하자마자 자리로 배달됐고, 소맥을 섞는 일은 늘 내 담당이었기에 나는 소주병을 열고 소주잔을 두 개 겹쳐 선까지 소주를 따라 각자의 잔에 부었다. "캬 좋다. 정욱 님 항상 느끼는데 소맥 진짜 기가 막히게 말아주시네요. 아 뭉티기 빨리 먹고 싶다."승환 님이 시원하게 소맥을 원샷한 뒤 으레 하던 감상평을 남겼다. "근데 오늘은 어쩐 일이십니까?"잔에 있던 소맥을 절반정도 비운 뒤 내가 묻자 "에이 우리가 뭐 일이 있어야만 마시나요. 그냥 요새 못 본 지도 좀 됐고 해서."하고 모임의 주최자인 혜인 님이 답변했다. "근데 사실 아주 일이 없는 건 또 아니긴 한데, 이건 진짜 비밀이에요. 안주 나오면 해드릴게요."사람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예고 비밀을 혜인 님이 던졌고, 옆에서 승환 님이 능청스럽게 한마디를 거들었다. "충격받아서 술 먹고 개취하지 말고 형." "하... 씨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여? 사람 궁금하게 만드는구먼"나 역시 그들의 장단에 맞춰 능청스럽게 한마디를 거들고는 잔에 있는 술을 마저 털어 넣었다. 이윽고 뭉티기가 자리에 깔렸다.


그들이 새빨간 뭉티기를 한 입 먹으며 내게 한 얘기는 절대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건 글로벌 앱 론칭이 중단된다는 소식이었다. 만약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건 그야말로 핵폭탄이 될 터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다음 주 론칭을 앞두고 열심히 옆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콘텐츠실 동료들이 떠올랐다. 특히 팔자에도 없는 팀장을 달았다며 불평하더니, 자리에 대한 부담감 탓인지 평소 하지 않던 야근을 밥 먹듯 하던 지민 님이 가장 먼저 걱정됐다. 일단 이 소식은 나만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아이... 구라 치지 마요. 설마.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니까..."하고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혜인 님이 그 말에 쐐기를 박았다.


"론칭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좀비 앱이 될 거예요. 살아만 있고 아무 기능도 하지 않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죽은 앱. 마케팅실에 글로벌 마케팅 예산이 전혀 투입이 안되고 있는데 이게 무슨 소리겠어요 석준 님. 우리 SEO 하려던 거 있죠? 그거 왜 중단했겠어요? 원래 마케팅 예산 줄이려고 지은님이 SEO 해보라고 하다가, 아예 글로벌 자체에서 손 떼려니까 중단한 거지. 일단 아예 중단한다고 말하면 서비스 본부나 개발본부 여론이 난리 날 것 같으니까 지금 론칭 중단 얘기는 안 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안 들어올 텐데 서비스를 어떻게 해... 마케팅 팀이 호구인가. 11월에 마케팅 중단하라고 해놓고 우리 지금 거의 두 달째 놀고 있어요. 이걸 좋아해야 돼 말아야 돼"


정신없이 쏟아낸 혜인 님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지금 거의 다 개발된 이 앱을 엎는다고? 심지어 외주 업체에 브랜딩까지 맡겨서 이름까지 정한 이 서비스를? 만약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누구 하나 대표 면전에다 대고 쌍욕을 한대도 아니, 회사를 불태운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 역시 두 달 동안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삽질을 위해 그 개고생을 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 반, 아무리 회사가 엉망진창이더라도 이렇게 쓸모없이 리소스를 낭비하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 반으로, 그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론칭을 하더라도 좀비 앱이 되고 말 거란 혜인 님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내가 회사에 갖고 있던 믿음들은 빠르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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