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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Jan 04. 2016

마법같은 순간들

(2015.01.02 in Paris, France) - 2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향하던 길, 튈르리 정원에서 콩코드 광장을 바라보고 서면 작은 관람차를 볼 수 있었다. 우뚝 솟아 묵묵히 돌아가는 관람차는 떠들썩한 사람들의 무리와 대조되면서 우아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그때 문득 우리가 관람차를 보며 낭만적인 생각에 빠지고, 재미없이 조용히 돌고 있는 관람차에 올라타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들썩한 사람들 사이에서 벗어나 조용한 공간에 있고 싶은 욕구와 사람들 속에서 우뚝 솟아 저 혼자 다른 세상에 사는 듯이 우아하게 도는 관람차가 되고픈 마음. 우리는 이런 마음들이 조금이나마 채워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관람차에 올라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쩐지 저 혼자 커다랗게 툭 튀어나온 관람차가 튈르리 정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눈감아줄 수 있었던 건, 이런 관람차의 낭만적인 속성들 때문이었을 테다.


오르세에서 오랑주리까지는 30분 정도만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으나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걷다 보니 두 시간이나 걸려 도착했다. 오랑주리 미술관이 오르세에 비해 유명세가 덜해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다. 미술관 앞은 벌써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재빨리 긴 줄의 맨 뒤에 자리를 잡고 모네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렸다.

미술관에 입장하기 위해 긴 줄을 기다리는 일은 놀이동산에서 놀이기구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했다. 딱히 할 일도 없이 긴 기다림의 시간을 감내해야 하는 시간. 앞뒤로 모르는 사람과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어색한 공기 속에서 보내는 시간. 그러나 그 어색한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건, 그 속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긴 줄 속에 서있으면 서로가 같은 목적을 위해 긴 시간을 감내하고 있다는 일종의 동료애를 느낌과 동시에 타인의 들뜬 모습을 보며 내 표정을 가늠해볼 수 있었고, 그건 일상 속에서 아무 연고도 없는 타인을 가장 오랜 시간 관찰할 수 있는(그럴 수밖에 없는)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기다림은 때와 장소, 목적을 불문하고 서로가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 다니는 여행자에게 기다림의 시간은 고통스럽다. 핸드폰도 잘 터지지 않는 곳, 누구와도 말할 수 없고 세계 각국의 언어가 들리는 외국에서는 더더욱.


그렇게 앞뒤로 난생처음 본 사람들에 둘러싸여 하릴없이 돌아가는 관람차나 쳐다보고 있는 일도 슬슬 질려갈 때쯤, 갑자기 앞에 있던 중년의 남자가 종이와 펜을 꺼내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그의 아내는 그런 남편의 모습을 옆에서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화려하거나 경이로워서 한눈에 눈을 사로잡거나 하는 광경은 아니었지만 미술관 입장을 기다리며 견뎌야 했던 길고 지루했던 그 시간은 이 중년 예술가의 등장으로 한순간에 마법과도 같은 시간으로 바뀌어있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면서 기대하는 건 기억 저편에 고이 간직해두었다가 가끔씩 꺼내어 볼 수 있는 마음속의 장면을 마주하는 일일 테다. 단언컨대 여행에서 마주하는 광경들은 모두가 절대적으로 아름답지도 않고, 매 순간 기억에 남을 정도로 강렬하지도 않다. 여행의 대부분은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걷고 또 걷는 시간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그리고 목적지와 목적지 사이에는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들과 우리의 시선을 전혀 끌지 못하는 풍경들로 가득하다. 그렇기에 때로 여행을 하다 보면 장소만 바뀐 일상의 연속에 불과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일상과 다른 점 역시 장소만 바뀐 다른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일상이 다른 장소에서 벌어진다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가 여행을 떠나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일상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마법 같은 순간들은 우리의 둔해져 버린 감각 때문에 쉽사리 지나쳐지곤 한다. 그러나 낯선 여행지에서는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렇게 되살아난 우리의 감각들은 그런 순간들을 더 쉽게 포착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니까 여행은, 마치 주유소와도 같다. 여행을 통해 마음 속 장면(이라는 연료)을 충전시킨 뒤 다시 뚜벅뚜벅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그림을 그리던 그는 다시 수첩과 펜을 집어넣고 아내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사이 줄은 미술관 바로 앞까지 줄어들어 있었고 잠시 후 나는 드디어 오랑주리 미술관에 입장할 수 들어갈 수 있었다.


오랑주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은 원래 튈르리 정원에 있는 오렌지 나무를 위한 겨울 온실이었다고 한다. Orangerie가 원래 프랑스어로 오렌지 나무용 온실을 뜻하니, 우리나라 말로 하면 '오렌지 온실 미술관'정도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이름이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1922년 모네가 자신의 수련 그림을 이곳에 기증하기로 계약하면서 그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오랑주리 미술관의 주인공은 미술관 1층에 전시되고 있는 여덟 점의 수련 연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역시 오직 이 작품들을 감상하기 위해 오랑주리를 찾았으니 말이다.


오랑주리에 전시된 모네의 수련 연작들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두 개의 방에 파노라마처럼 전시된 거대한 모네의 수련 연작은 보자마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감탄사를 자아내게 했다. 온통 새하얀 전시실 내부와 수련 연작이 내뿜는 신비로운 푸른빛의 조화가 매력적이었던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거의 울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천장의 유리 지붕으로부터 은은하게 들어오는 햇살과,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모네의 수련 연작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파리라는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주었다. 그림들에 그대로 매료된 나는 미술관이 끝나는 시간까지 전시실을 돌아다니며 하염없이 감상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정말 아쉽게도 그 당시 오랑주리의 사진 촬영은 엄격하게 제한되어있었다. 단 한 장이라도 남겨오고 싶었으나 사진을 찍다가 걸려서 그 감동적인 순간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는 선에서의 사진 촬영은 허용된다고 한다.


이번에도 역시 오랑주리 미술관의 공식 홈페이지(http://www.musee-orangerie.fr/fr)와 페이스북 페이지(https://www.facebook.com/museedelorangerie/)에서 퍼왔음을 밝힌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내부 모습. 다시 봐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출처 : 오랑주리 미술관 페이스북 페이지
가끔 미술관 내부에서 이벤트도 하는 듯 하다. 얼마전엔 음악회도 있었다고.   출처 : 오랑주리 미술관 페이스북 페이지
Claude Monet, Les Nymphéas : Le Matin aux saules   Paris, Musée de l'Orangerie
Claude Monet, Les Nymphéas : Les Nuages   Paris, Musée de l'Orangerie

미술관이 문을 닫는 시간이 되어서야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밖으로 나왔다. 오랑주리 미술관 바로 앞에 있는 콩코드 광장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있었고 해가 지고 난 뒤의 저녁 하늘은 짙은 푸른빛을 띄고 있었다. 블루 아워(l'heure bleue)였다. 블루 아워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겐 골든타임과 더불어 일명 '매직 아워'라 불리는 시간대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해 뜰 녘과 해 질 녘의 박명이 지는 시간을 뜻한다. 이 시간대의 하늘이 신비로운  푸른빛을 띠고 있어, 촬영한 사진들의 색감을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해 준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 시간대를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고 은유적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해가 설핏 기울고 땅거미가 질 무렵 나에게 다가오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기묘한 이 시간대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주는 비유다.

마침 모네의 작품들을 감상하고 나온 탓이었을까, 푸른빛의 하늘이 괜히 더 아름답게 다가왔다. 자연에 반사된 빛과 시간과 날씨에 따른 빛의 변화를 관찰하며 평생을 살아온 모네. 어쩌면 내가 모네라는 작가에 매혹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진 역시 결국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곤 하는데, 그렇다면 사진이 취미인(이제는 직업이 되어버린)나 역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모네 만큼이나 빛의 변화와 그에 따른 자연의 색감에 민감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푸른빛이 내려앉은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서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모네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남은 채 떠나지 못하고 사진을 찍다가 이내 샹젤리제 거리로 향했다. 개선문까지 길게 뻗어있는 길은 아직 축제 분위기로 한창 들떠있었다. 다시 한번 새해가 온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한편으로는 쓸쓸함이 밀려왔다. 게다가 미술관에만 있다 나온 탓이었는지, 나는 마치 환상에서 현실로 끌어 내려진 기분을 느꼈다.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 있으니 그런 기분이 한층 더 심해지는 것만 같았던 나는 이내 구경을 접고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날 본 파리는 온통 예술적 영감과 낭만적인 분위기가 공기 속에 가득 차있는 도시였다. 문득 파리에 도착해 처음 느꼈던 당혹감은 바로 이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는 비단 긍정적인 느낌만은 아니었다. 흔히 예술은 긍정적인 속성보다 부정적인 속성에 더 강력한 지배를 받곤 한다. 예민하고 순수한 영혼을 갖고 있기에 쉽게 다치고 쉽게 상처받는 예술가들. 그래서 남들보다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자주 맞이하지만 이를 동력으로 삼아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사람들. 예술가란 자신의 영혼을 소진해서 태운 뒤 그 불빛으로 타인을 밝게 비추는 존재들이 아닐까.

그때 나는 왜 파리지앵들이 유난히 시끄럽고 별나게 느껴졌는지, 사람들이 파리를 왜 예술과 낭만의 도시라 부르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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