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욱 May 15. 2016

끝맺지 못한 이야기들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 '실연에 관한 박물관'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너무 당연한 문장이지만 죽을 때까지 익숙해질 수 없는 문장이기도 하다. 내 곁에 있던 익숙한 존재가 사라지는 일, 세상에서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있을까. 우리는 이를 가리켜 상실이라 부른다. 그리고 상실이라는 감정은, 다른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을 잃은 뒤에 가장 강렬하게 우리를 찾아온다.


사랑을 잃고 느끼는 상실감을 우리는 연애에 실패했다는 뜻의 '실연(失戀)'으로 부르곤 한다. 단순한 상실을 넘어 사랑을 잃었을 때의 감정을 따로 지칭하는 단어가 있다는 건, 그만큼 실연의 감정이 우리에게 크게 다가오기 때문일 테다.


실연을 극복하는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는 수 억 개의 사랑만큼이나 다양하다. 어떤 이는 술을 마시고, 어떤 이는 음악을 듣고, 어떤 이는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저마다의 슬픔을 견디어낸다. 그것이 어떤 방법이든, 공통점이 있다면 결국은 오롯이 혼자서 시간을 감내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술과 음악과 눈물로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타인이라는 까마득히 먼 별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질 수 있다.


그리고 여기, 이런 아픔을 함께 치유하고자 하는 하나의 박물관이 있다.

'실연에 대한 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


이번에 제주에 며칠 쉬러 내려갔을 때, 우연히 이 전시에 대한 내용을 전해 듣곤 꼭 관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아픔과 실연의 기록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라니. 얼마나 먹먹할까, 얼마나 가슴 저릴까. 그리고 그 아픈 사연들로 나는 또 얼마나 치유받을 수 있을까.


실연 박물관은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의 한 커플로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실연 박물관의 공동 디렉터로 있는 올링카 비스티카(Olinka Vistica)와 드라젠 그루비시치(Drazen Grubisic)는 과거 연인 사이였다.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 처치 곤란했던 물건들을 정리하며 시작했던 것이 바로 실연 박물관의 시초였다고. 박물관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실연 박물관은 파리, 런던, 샌프란시스코, 베를린, 싱가포르, 대만, 브뤼셀, 바젤 등 세계 22개국 35개 도시에서 순회 전시를 가지면서 현재 1,000여 점이 넘는 물품과 사연을 소장하게 되었고, 2010년에는 자그레브에 상설 박물관을 열며 현재까지 전시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이번에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에서는 한국에서 기증받은 사연과 물건 67점과, 기존에 해외에서 기증받은 46점을 전시하고 있었으며, 전시는 총 네 가지 주제로 이루어진 네 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사람을 위한 작은 박물관(My little museum)

사랑의 위성(Satellite of love)

그대여, 안녕(Farewell to you)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

각각의 층에는 저마다의 컨셉에 맞는 사람들의 사연들과 물건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자책으로 사연을 읽으며 구경하는 전시였는데, 아직 전시 초기라 그랬는지 함께 전시를 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덕분에 나는 혼자서 조용히 전시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부터, 저마다의 사연이 담긴 독특한 물건들까지. 그곳엔 수많은 개인들의 이야기와 역사가 흐르고 있었다. 그 이야기들은 때로는 유쾌했고 대부분은 가슴 미어지게 슬펐다. 헤어진 연인, 사랑하는 가족, 나이 든 애완동물, 이제는 멀어진 친구까지. 이 공간에선 내 주변의 누군가가 자꾸만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사연들은 사적이면서도, 보편적이었다. 끝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시작된 이야기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어느 하나 중복되지 않는 물건들 사이에는 오로지 헤어짐이라는 공통점만 존재할 뿐이었다. 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물건들에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구나 하고 새삼스레 놀란 전시였다. 슈퍼에서 흔히 살 수 있는 통조림 캔 하나도 이 곳에선 이야기가 되었고, 작품이 되고 있었다.


문득 내 방에 있는 차마 버리지 못한 수많은 잡동사니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라면 이 곳에 어떤 물건을 기증했을까'하고 생각했다. 너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었을까, 아니면 떠난 외할머니께서 내게 주셨던 마지막 물건이었을까. 저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이 곳에 물건을 보냈을까. 나라면 보낼 수 있었을까. 많은 질문을 던지는 전시였다. 버린 뒤에야 비로소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면, 나는 아직 온전히 끝맺지도, 시작하지도 못한 이야기들 속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 전시에서 가장 나를 많이 울렸던(사연을 하나하나 읽던 나는 어느덧 주체할 수 없이 울고 있었다. 혼자 관람해서 천만다행이었다.)세 가지의 사연들이다. 위에서부터 '음악을 들을 때마다', '아빠 차를 부탁해', '우리 집 강아지 호두'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아버지를 위해 아들이 사 온 스피커,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이 남긴 이 스피커로 아직도 음악을 듣는다는 아버지.


클래식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스피커를 어깨에 짊어지고 오던 (아들의) 모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중략) 아들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인근 성당의 종을 하루 세 번씩 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아이와 한 여자를 남겨둔 채 떠난 아빠와의 추억이 담긴 낡은 차. 그 세 가족이 차를 떠나보내며 아버지,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아빠랑 코란도를 타고 산으로 오프로드를 달려서 고기를 구워 먹은 생각이 아직도 선명해요. 교회를 마치면 엄마는 봉사를 하고 늦게 오니 아빠가 미역국을 끓여주셨어요. 그때는 꿀맛이었어요. 아빠랑 같이 게임을 할 때는 정말 신이 났어요. 나 아빠를 다시 만난다면 그동안 너무 보고 싶어서 그냥 아빠 안고 울고만 있을 것 같아요.


아픈 애완견의 대소변을 받아주던 기저귀. 그래서 각각의 기저귀에 꼬리를 위한 십자 모양의 칼집을 냈지만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이별로 쓸 수 없게 된 세상 단 하나의 존재만을 위한 기저귀들.


깡마른 몸에 털이 듬성듬성해 볼품없는 개를 가방에 담아 산책길에 나서면 마주치는 누구도 예쁘다는 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개는 불쌍하고 측은하기보다 멋있었습니다. 차마 다 버리지는 못한, 십자 모양의 칼집이 난 기저귀들을 보며 우리 가족은 죽은 개를 기억하고 그 강한 생명력과 단정한 작별을 떠올릴 겁니다. 가장 좋았던 모습으로 간직하는 건, 이별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배려니까요. 잃었음을 슬퍼하는 대신 함께 있었음에 감사하면서 말이죠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치유된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너무나 오래전 일인 것 같아서 전시 내내 눈물을 흘렸다. 세상의 모든 상실과 이별은 이렇게나 아름답고 저리다. 살아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전시다. 그리고 슬픔을 딛고 살아내야 한다고 말해주는 전시다. 결국 삶에 대한 전시다. 전시를 보며 헤어진 연인이 하나의 물건 앞에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전시를 다 구경하고 나니, 작은 테이블에 공책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 무엇을 적을까 한참을 흰 종이 앞에 앉아 있다가 결국 그대로 나왔다.


아마도 다음번 여행은 세상의 수많은 이별들이 모여 있다는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가 될 것 같다.


전시는 9월 25일까지 진행된다고 합니다. 제주에 들를 일이 생기신다면 한 번쯤 보고 오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예요. 제주 공항 근처에 있으니 비행기를 타기 전에 보시는 편이 가장 적절할 듯 싶습니다.


전시정보

http://www.arariomuseum.org/exhibition/#/dongmun-motel2.php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의 해무(海霧)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