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낯설게하기 Oct 05. 2020

세연에게

코로나 백수의 하소연 에세이

텔레비전 퀴즈쇼에서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몇 층인지에 대한 문제가 나왔다. 얼마 전 뉴욕에 직접 다녀온 아빠는 큰 목소리로 “내가 저기 가봤잖아, 101층! 확실해” 라고 외쳤고, 옆에서 콩나물을 다듬고 있던 엄마는 조그만 목소리로 “102층..” 하며 혼잣말하듯 입 모양을 뻐끔거렸다.   


정답은…

두구두구두구

102층입니다 !



 나는 깜짝 놀라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봤어.” 하며 다시 콩나물을 다듬었다. 사실 이런 상황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엄마는 경제, 정치, 사회, 역사에 대한 상식뿐 아니라 워너원 해체 후 멤버들이 근황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고 기억력까지 좋다. 수학교사인 언니가 말하길 아직도 근의 공식을 다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27살 꽃다운 나이에 결혼한 후 삼십 년간 쭉 가정주부로 지낸 그녀가 가사노동을 하는 것 외에 가장 많이 했던 행위는 독서였다. 비록 지금은 노안으로 인한 시력저하로 인해 작은 글씨를 오래도록 보지 못하지만,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돋보기를 쓰고 뭔가를 읽거나 적거나 하는 행위를 반복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아는 사람 중 가장 성실한 사람이다. 아침 기도 – 아침밥 차리기 – 요가 – 노숙자, 장애인 복지센터 봉사활동 – 청소하기 - 장보기 – 저녁 하기 – 독서 (여기에 주변 사람들 경조사 챙기기까지) 루틴을 한 번도 어긴 것을 본 적이 없다. 시간 경영에 있어서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글을 쓰고 달리기를 하며 자기관리에 철저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무라카미 하루키 아저씨도 울고 간다.  



 더 놀라운 사실은 유능하고 부지런한 데다가 그 모든 일들을 밝고 긍정적인 태도로 임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시아버지 치매 간병을 몇 년 동안 하셨을 때, 기저귀를 갈고 목욕시킬 때도 콧노래를 부르며 해내는 걸 보고 자기 자식도 하기 싫어하는  하는데 억울하지 않아?” 라고 물었을 때는 “이왕 해야 하는  울면서   없잖아하며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엄마의 재능과 상냥함에 대해서 곱씹어 볼 때면 종국에는 화가 나고야 만다. 결국 그 재능이 누군가의 편리함을 위해 사용되었던 사례들이 동시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 부모님의 나이와 직업을 적어 내라는 숙제를 받고, 엄마의 직업란에 '가정주부'라고 적었다가 바로 그 글씨를 지우개로 지웠다. 오래도록 빈칸을 노려보다, 엄마에게 달려가 질문을 건넸다.



“엄마는 내 나이 때 꿈이 뭐였어?”

“작가”

“그런데 왜 작가가 되지 못했어?”

“집에 딸 대학까지 보내줄 형편이 못 됐어. 송미야  그런데 이런 얘기 그만하면 안 될까?”



 엄마는 누군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물어 올 때면, 아직도 늘 대답을 회피하거나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그래서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정보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닌 그녀의 남동생이나 여동생을 통해 듣거나 오직 내가 눈으로 관찰한 것들뿐이었다.



 7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는 것. 어릴 적 집이 부유했다가 갑자기 가난해졌다는 것. 학창 시절 공부를 잘했다는 것. 아빠와 결혼해 오랫동안 4명의 노총각 도련님과 시아버지의 가사를 맡아 했다는 것. 새벽마다 울면서 기도하고, 기도가 끝나면 늘 웃는 표정이라는 것. 아빠를 착하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 그 누구의 험담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대신 단짝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것. 꾸준히 운동을 하고, 봉사활동을 한다는 것. 어린아이들을 좋아한다는 것. 주어진 일을 미루지 않는다는 것. 7살 때 나에게 빨간 머리 앤 시리즈와 베르샤유 장미를 보여준 사람이라는 것.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기 위해 늘 명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



내가 만든 첫 다큐멘터리 상영이 끝나고 바라본 엄마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 표정은 ‘빌리엘리어트’ 엔딩 씬, 발레리노가 된 빌리가 높게 첫 점프를 했을 때 객석에서 조용히 아들을 바라보며 감격하던 재키의 표정을 닮아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본가에 방문했다. 엄마는 나를 반가워하며 점심상을 차렸다.

밥을 먹는 나의 얼굴을 보며 그녀가 말했다.



“너는 분명 내 뱃속에 나왔는데

내가 생각해보지도 못한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아”



엄마의 부지런함으로 늘 청결한 거실과 완벽하게 차려진 밥상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7남매의 둘째로 태어나지 않았고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면 61년생이 아니고 89년생이었다면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여건이었다면 해외 곳곳을 누빌 수 있고 삶의 선택지가 더 다양한 시대를 누렸다면


엄마의 가능성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 보여줄게.


잘 봐, 세연.


작가의 이전글 무소유를 소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