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백수의 하소연 에세이
일주일 내내 마음에 걸리는 얼굴이 있다. 작업실 2분 거리에 있는 편의점 사장님의 얼굴. 일 년 반 전, 내가 이사 왔던 그 시점에 편의점도 개업을 시작했다. 편의점을 방문할 때마다 내 또래로 보였던 사장님은 환한 인사와 함께 간식을 건네 주곤 했다.
“안녕하세요 ~ 이거 한번 드셔보실래요? ^^!”
바나나, 초콜릿, 견과류 같은 것을 내 손에 한 움큼 쥐어주며 안부를 물어줄 때마다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찌꺼기 같은 것들이 다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이유 없이 무례한 사람이 주는 불쾌감 만큼 사람의 마음을 좀먹게 하는 것이 없듯, 이유 없는 다정함은 그 어떤 것도 긍정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유 없는 다정함에 대한 미담 하나를 알고 있다. 군대에서 잘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 남자가, 새벽 근무를 끝내고 자살을 결심했던 어느 날 슈퍼에서 시원한 콜라 한 잔을 마시고 죽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런데 그의 호주머니엔 50원 밖에 없는 게 아닌가.
'오늘 저녁 안 그래도 죽을 건데 먹고 싶은 콜라 한 잔도 못 먹고 죽겠네...'
그런데 그때,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한 남자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남자는 군인에게 이온음료 두 캔과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여주고는 “더운 날 드시고 하세요. 충성!” 하고 자리를 떠났다. 군인은 엉엉 울며 이온음료와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는 그날 단잠을 잤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사건은 아직도 자신을 살아있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건 인터넷에 유명하게 떠도는 유재석에 관련된 미담이다. 나는 그 편의점을 다녀올 때마다 유재석에 관련된 미담을 떠올리곤 했다.
'저런 사람도 세상에 있는데, 세상은 어느 구석 살만할 거야.'
그런데 변화가 일어난 건 한 달 전부터였다. 동업자와 사업을 접기로 한 후, 서로 휴식기를 갖기로 하고 또 전국적으로 외출을 삼가던 시기 나는 거의 2달 동안 작업실을 비웠다. 종종 물건을 가지러 작업실에 들렸을 때, 잠깐 지나쳤던 편의점은 휴업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긴 휴식기를 끝내고 다시 작업실에 출근을 시작한 한 달 전, 습관적으로 편의점에 들렀다. 그리고 카운터에는 반가운 얼굴이 서 있었다. 서로의 이름도 나이도 전화번호도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갑자기 호들갑을 떨순 없었지만 구운 계란, 요거트를 고르며 카운터에 계산하는 그 타이밍에 인사를 건네주시면 꼭 안부를 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카운터에 물건들을 내려놓았을 때 나는 미세한 공기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삑, 삑, 삑. 사천 오백원입니다. 나는 예상하지 못한 무미건조하고 바삭한 눈빛과 말투 앞에서 그 어떤 말도 건네지 못한 채 서둘러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그건 그날만의 우연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 몇 번이고 드나들며 보았던 사장님의 표정은 늘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그동안 어떤 사건과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던 걸까? 나도 거기에 일조한 사람일까? 몇 번이고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 어떤 안부도 물을 수 없었다.
편의점 사장님의 표정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그날, 퇴근길 버스정류장에 앉아 맞은편에 있는 빵집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그 사장님은 안 계시는군...'
아무리 작업실에서 늦게 나와도 늘 불이 켜져 있던 빵집. 저 빵집에 들어가면 반드시 빵을 사게 돼있다. 아빠 나이쯤 되어 보이는 사장님이 가위로 이것저것 배 터지게 시식을 시켜주시며 구매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어느 날 시식 후 “이제 배불러서 안 살래요”라고 장난친 적이 있는데 뭔가 기대에 찬 눈망울이 순식간에 검은색을 띠는 것 같아 수습하듯 뭐라도 양껏 사서 나온 적이 있다. 그날 이후로 늦은 밤 퇴근길 버스정류장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사장님의 표정을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시식 빵을 손에 한가득 들고 언제나 열심히 밝으신 그 표정 외에도 이 시각엔 저런 얼굴을 하고 계시는구나. 그런데 요즘엔 그 사장님이 통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빵의 유통기한은 언제까지 일까 궁금해진다.
다음날 나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작업실 근처 단골 분식집에 들어가 김치볶음밥을 시낀다. 이 가게도 저번 주까지 긴 휴업을 선언하고 오랜만에 문을 열었던 상황이었다.
“아유 ~ 오랜만이네 ~ 그동안 잘 지냈어~?” 입구에서부터 사장님이 건네주시는 다정한 인사에 눈물 날 정도로 안심이 되었다. 나는 평소보다 더 밝은 표정으로 화답하고 김치볶음밥을 싹싹 비워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새삼 작업실 주변에 있는 가게 사장님들께 그동안 얼마나 큰 용기와 힘을 받았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빵집 사장님이 열심히 빵을 파는 걸 유리창 너머로 볼 때마다 '나도 성실하게 영상 만들어야지!'라는 결심. 편의점 사장님이 항상 다정한 안부 인사를 걸어올 때마다 '나도 사람들에게 밝은 기운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결심. 단골 분식집 사장님이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네~”라며 말해주실 때마다 '나도 저런 어른이 되어야지'라는 결심.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일상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니.
늘 잘 웃던 사람, 늘 성실하던 사람, 늘 긍정적이던 사람, 늘 친절하던 사람, 늘 꾸준하던 사람들에게서 변화를 느낄 때 그 격차는 훨씬 더 크고 슬프게 다가온다. 요즘 편의점 사장님의 눈빛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이유는 그 눈빛에서 요즘 내가 짓고 있는 눈빛의 유사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눈빛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
이틀 뒤면, 작업실이 없어진다. 작업실을 빼면 더 이상 가게 사장님들을 볼 일도 이 동네에 다시 올 일도 없겠지?
삑. 환승입니다. 버스에 카드를 대고 기사님을 향해 새삼스러운 인사를 건네본다. 터벅터벅 작업실로 걸어가는 길목에 새로 생긴 커피숍을 발견한다. 그 가게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시킨다. 동네 사람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붐비는 가게를 보니 꽤 장사가 잘 되는 듯하다.
밝게 인사를 건네주시는 사장님의 얼굴에서 예전에 본 듯한 얼굴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