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이름입니다 밴드 이름!!
‘푸른 하늘’과 ‘화이트’를 이끌었던 뮤지션 유영석을 싫어하는 것을 넘어 인정하지 않게 된 계기가 있다. 그가 탑밴드 시즌 1이었던가? 심사위원으로 나왔던 시절 사이키델릭 포스트록 밴드 ‘프렌지’의 라이브를 보고는 이런 심사평을 내었다.
음악의 3요소는 리듬, 멜로디, 하모니죠?
기본이 안 되어 있어. 멜로디가 없잖아.
보컬이나 기타의 뚜렷한 주선율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범위를 좁혀 1980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바뀐 음악 판도를 생각하면, 새로운 음악 스타일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면에서 그는 꼰대 of 꼰대였다. 이것은 내가 탑밴드를 비롯한 모든 경연 프로그램을 보지 않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누가 누굴 평가해. 하지만 프렌지는 나보다 더 타격이 심했나보다. 이런 심사평을 들은 이후, ‘한국 포스트락의 기대주자’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팀을 해체하고 ‘9와 숫자들’ 등 각각 다른 팀으로 흩어지며 그 끝을 맞이하게 된다.
프렌지는 ‘아폴로 18’의 단단함과, 오늘 이야기할 '이 밴'드의 사이키델릭함을 이어받은 포스트 락 밴드다. 무슨 꺾기도도 아니고, 오늘의 주인공은 프렌지가 아니라 '이 밴드'. 한국 사이키델릭 슈게이징의 대표적인 밴드다. 이름은,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
1999년 ‘옐로 키친’이 한국에 ‘슈게이징’이라는 씬을 열어젖혔다면,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이하, 속옷 밴드)는 일정한 팬덤을 유지하며 씬을 이끄는 슈게이징 포스트록 밴드다. 이 기기묘묘한 이름은, 밴드 이름에 ‘속옷’과 ‘여자’라는 단어를 넣고 싶었던 멤버들이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의 한 구절 ‘양옥집도 생겼고 기왓장도 늘었다네’를 ‘우라까이’ 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기타에 조월과 박현민, 정승호, 베이스 장윤영, 드럼에 정지완 등 총 5인으로 이루어진 속옷 밴드는 사실상 음악 크루에 가까운 ‘모임 별’에서 사이드 프로젝트로 발전한 팀이다. 앰비언트 포크로 솔로 활동을 하고 있는 조월, 리버브와 공명감 가득한 밴드형 슈게이징으로 ‘니나이안’이라는 솔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박현민, ‘헬리비전’과 ‘구릉열차’, ‘세컨세션’ 등 잼밴드 스타일 팀에서 다양하게 멤버로 활동하는 정지완이 만난 만큼 모드를 감싸 안으면서도 독특한 질감의의 슈게이징 사운드를 쌓아나가는 팀.
하지만 속옷 밴드는 기본적으로 약간 취미 밴드스러운 구조로 운영되고 있는 탓인지, 이들은 대중과의 소통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다. 멤버 전원이 전업 뮤지션도 아닌 듯 하고, 음... ‘다른 거 하다 남는 시간에 속옷 밴드 한다’는 느낌이 든달까? 그래서 정말 가뭄에 콩나듯 공연을 한다. 그것도 급한 공지로. 막말로 BTS 공연보다 예매하기 힘들다. 몇석 되지도 않고 매진도 빠르지만, 공연 공지를 대대적으로 하지 않으니 놓치기 일쑤..
음악이 허술하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들은 데뷔한 이래 2003년 EP <사랑의 유람선>과 2006년 정규 1집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 등 두 개의 음반만을 냈지만, EP는 음악 평론 웹진 ‘백비트’ 선정 ‘한국에서 꼭 들어야 할 100대 명반’ 순위에 올라 있다.결정적으로, 본인들이 별로 유명해지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음원 사이트에서 그들의 음악 스트리밍과 구매는 모두 막혀 있다. CD는 죄다 절판이고.
결국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유튜브뿐인데, 가장 유명한 것이 ‘온스테이지’ 버전이다. 이 버전은 영상도 양질로 촬영되어 있고 사운드 역시 훌륭하다. 진짜 뱀이 나올 것 같은 음산한 기타 아르페지오에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베이스와 드럼… 적시에 빵 터져서 혼란을 만들어내는 섹션의 팀워크 모두 훌륭하다. 그나저나,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의 < 이 무서운 왕뱀을 향해 화살통 하나가 다 빌 때까지>라니… 가사 하나 없는 곡이 너무 제목이 장황한 것 아닌가? 다른 라이브들은 모두 개인 팬들이 올린것이라 사운드가 많이 떨어진다. 다행히도 속옷밴드의 많은 음원들은 대부분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그 중 팬들이라면 모두 반길 것은 이 노래다.
아마 밴드를 해본 사람은 알 텐데, 이 노래는 합주실에 들어와 내 자리에 앉아 악기 잭을 꽂고 연주를 시작하는 장면이 노래 인트로에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다. 그 이후 노래는 기승전결을 반복하며 특별한 보컬이 없는 연주 그 자체로의 즐거움을 잘 보여준다. 이 노래의 제목은 ‘안녕’.
이들의 공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스트루멘틀로 멘트 없이 주욱 이어지는 게 특징인데, ’Hello’와 ‘Bye’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만큼 <안녕>은 속옷 밴드의 라이브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넘버로 쓰이고 있다.
이들의 정규 음반을 구입해 마음껏 들을 방법은 현재 두 가지뿐이다. 속옷 밴드를 비롯해 ‘모임 별’과 ‘불싸조’, ‘위댄스’ 등 실험적인 음악들을 유통하는 홈페이지 ‘만선’(https://maansun.com/)을 통해 디지털 음원을 구입하는 것과, 나와 친해지는 것뿐. (아 두 번째 방법은 불법인가?)
이들의 음악이 쉽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잠시 넋을 놓고 듣고 있자면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 <Lost Highway> 같은 영상을 한 편 보는 것 같은 안갯속의 몽롱한 이미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자부한다. 녹음 상태가 그다지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급적 좋은 음향으로 크게 들을 것.
P.S) 그들의 홈페이지를 팔로우하다 보면 정말 가뭄에 콩 나듯 라이브 소식을 들을 수 있다. (현재 2018년이 마지막). 나는 2010년 라이브를 봤는데, 클럽에 들어가 공연시간이 되니 밴드가 모두 나와 드럼을 제외한 모든 멤버가 관객을 등지고 지들끼리 무대에 동그랗게 둘러앉더라. 이윽고 멤버 조월의 한마디로 공연이 시작됐다. '무대와 객석 조명 모두 꺼주세요'. 지하 클럽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그들의 음악에 반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