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지된장 전골되시겠다!
수많은 단점을 기생충처럼 품고 살지만, 지금 이 순간 문득 생각나는 내 단점 중 하나는 ‘생각을 깊게 하지 않고 섣부르게 마구 부탁하고 호언장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단점을 약간이라도 상쇄하는 것 한 가지는, 말한 건 반드시 지키고 수습하려 하는 최소한의 양심이다.
비교적 급작스럽게 잡힌 이번 출장. 늘 부산에 가면 들르는 곳이 있다는 걸 또 깜빡하고 브런치에서 친해진, 부산 사는 작가님에게 삐삐를 쳤다. 즉흥적이고 감상적이지만 사려 깊고 섬세한 작가님은 카톡 대화방에 맛집이 불현듯 떠오를 때마다 툭툭 던져주시고. 오호~ 이번 부산 여행은 삼시네끼 정도로 가야겠어!
그러나 막상 새벽같이 서울을 떠나 부산에 도착한 다음 점심도 굶고 일을 하다 보니 진이 빠지더라. 작가님이 추천해준 맛집은 밀면집과 비빔밥집 말고는 전부 숙소인 해운대에서 거리가 좀 있고… 부산 올 때마다 들르던 서면 전포동 가는 것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쉽지 않았다.
그래서 첫날은 그냥 부산 사는 친구가 숙소 부근으로 와서 (해운대에서 대체 왜) 곱창에 소주를 와카카캌 퍼마셨더랬지 뭐야. 아침에 일어나 원고를 쓰던 중 불현듯 생각이 났다. ’그래도 시간 내서 써치해 주셨는데, 작가님이 수고하신걸 無로 돌리진 말아야지!’ 숙소 췌킷아웃 시간을 얼마 안 남기고 작가님의 맛집 리스트를 꼼꼼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남포동 치킨은 혼자선 좀 느끼할 것 같고, 껍데기도 낮에는 왠지 망설여지고. 그때 들어온 게 ‘우리가 남이가!’의 산실 영도. 그래. 일단 영도로 가서 카페에서 일을 다 마무리한 후 한 잔 하는기다!
해운대서 버스를 타고 한진중공업 정류장에 내려 잠시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을 위해 화살기도를 날린 뒤 본격적으로 영도 맛집 부근 카페로 향했다. 그런데 내 다리가 문득 잊고 있던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영도의 한자가 영島지….
섬은 많은 경우 작은 산봉우리를 기반으로 생성되어 있는 게 보통이다. 영도 역시 다리를 통해 육지와 연결되어 있을 뿐, 섬 아닌가…. 와.. 지도 앱으로 20분이라 나오는데 어째 이렇게 한결같이 죄다 고바우인 거야… 오늘 그 집 휴일이면 울어버릴 테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 카페에서 일을 마치고 드디어 목적지로 향했다. 부산 영도 ‘왔다 식당’.
‘왔다식당’은 한우 스지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스지 전문 식당’이다. 메뉴는 오로지 두 가지. 스지 전골과 스지 수육뿐. 앗쌀하니 좋구만. 메뉴 특성상 1인분은 안된다고 해서 까짓 거 그냥 왔다식당의 시그니처인 ‘스지 된장 전골’ 2인분을 시켰다. 좀 푸짐하게 먹는 셈 치지 뭐.
잠시 기다리면 간단한 밑반찬이 등장한다. 취나물, 오뎅, 단무지 무침, 톳 무침, 숙주나물, 고사리, 콩자반, 김치. 깨나 거한 상인데다, 이런데 왔으면 한병 까야지. 사장님예. 고급 소주가 뭡니꺼?
뭐 가격도 4천 원 똑같은걸 보니 특별한 술은 아닌가 보다. 밑반찬들은 적당히 짭짤하니 그냥 깨작깨작 밥반찬으로 먹고 있을 만 함. 오래 기다리지 않아 메인 메뉴가 나오니 조금 기다리면 될 듯. 음식을 놓는 사장님 말씀하시길, ‘한소끔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잠시 기다렸다 드이소’
끓을 때까지 꾹꾹 참았다가 그냥 무작정 한 숟가락 떠서 넘겨본다. 으악! 두부가 생으로 넘어갔네. 아 식도 뜨거워… 두부에게 뜨끈한 가르침을 받은 다음 조신하게 밑접시에 떠서 먹을 만큼 시켜봤다. 사람이 생각을 좀 해야지. 밑접시는 괜히 주는 게 아니다.
‘내 돈 주고 사 먹은 솔직한 후기’는, 일단 그렇게 많은 양이 아니기는 하다. 그런데 이 음식은 소, 게다가 한우 스지를 넣고 끓인 탕. 두 명이 식사로 먹기에는 넉넉한 수준이다. 2인분에 스지가 두 국자 정도 들어있는데 이게 2만 원이잖아. 일단 서울엔 이걸 제대로 파는 데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이제 본격적으로 먹어볼까? 잘 식힌 된장 육수 스지를 김치+스지와 청양고추+기본 양념장+스지, 기본 양념장+단무지+스지 세 가지 조합을 먹어봤는데, 일단 김치와 스지 조합은 탈락. 김치가 너무 세서 효율이 떨어지잖아. 같이 나온 노란 양념장은 무려 허니머스터드. 음, 누가 생각해 낸 거지… 된장 육수에 끓인 스지를 허니머스터드에 찍어 먹는다는 신박한 생각은? 짭짤한 된장 맛에 새콤달콤한 허니머스터드가 생각보다 잘 어울리네. 살코기가 붙어있는 부분보다는 스지의 비율이 높은 부위를 여기 찍어먹는 게 좋다. 아, 뭐 사실 다 맛있긴 함.
이런저런 생각하며 홀짝거리다 보니 그새 고급 소주가 바닥을 드러내고… 부산에서는 씨워어언~하게 C1 아잉교. 다 먹으면 집에 가기 쉽지 않겠지만 뭐 남기면 되지. 스지는 슬슬 다 먹어가고, 이쯤 되면 반드시 이런 종류 음식의 피날레 의식을 해줘야 한다.
다 함께 외쳐, 된장죽! 이미 찌개 건더기를 다 비워 밥을 먹기는 배부르지만 조금이라도 밥을 떠서 국물에 잘 끓여본다. 이렇게 고기 맛이 풍부한 육수에 탄수화물을 끓인 건 롯데 자이언츠의 이대호 같은 믿음직한 녀석이다. 몇 술 뜨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6시가 다 됐고…. 이제 서울로 떠날 시간. 담엔 넉넉히 시간 잡고 올게!!
지금은 왔다식당을 나와 부산역에서 수서로 향하는 SRT. 인트로에서 나의 섣부름과 무책임한 단점, 그리고 그것을 상쇄하려 하는 말은 꼭 지킨다는 그나마 나은 장점을 이야기했다.
나는 이번에도 이걸 먹고 흥분해서 호들갑 떤 것을 책임지기 위해, 주 성분이 건더기와 육수라는 무거운 녀석 스지 전골을 2인분씩 두 보따리 포장해 서울로 달려가고 있다. 아, 더럽게 무겁긴 한데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지는 것은 물론 이걸 먹고 좋아할 가족과 친구를 생각하니... 뭐 그래도 견딜만하다. 그런데, 정작 이 집을 소개해준 부산의 러블리한 무라카미 류 @사비나 작가님한텐 뭘 해드린 게 없네. 작가님 감사!
덧) 왔다식당은 평일은 6시, 주말은 5시 정도면 문을 닫는다. 보통 주말에 더 오래 하지 않나 싶은데, 한우 스지가 소 한 마리당 얼마 안 나오다 보니 주말에 재료가 더 일찍 떨어져서 그런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