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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Sep 16. 2021

왕관을 쓰려는 자, 그냥 왕관을 사라

씨랜드 공국 귀족 입성: 12월 3일부터 내 이름 앞에 Lord를 붙이라

Who dares to wear the crown, bare its weight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로 해석되는 이 문장은 셰익스피어가 ‘헨리 4세’에 남긴 말로 유명하고, ‘왕좌의 게임’의 대사라는 잘못된 정보도 많이 돌고 있다. 요즘은 드라마 ‘상속자들’의 대사로 더 많이 회자되고 있지 아마? 하지만 비슷한 말은 원래 많았다. 논어 이인(里仁) 편에도 '자신이 높은 자리에 있지 못함을 걱정하기보다, 그러한 자리에 갔을 때를 미리 대비하라'는 가르침이 있을 만큼, 이런 고민은 그냥 만국 공통인가보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 말을 조금 바꿔야 할 것도 같다. 

Those who want to go to a high position and wear a crown, 
just get your own light crown.

높은 자리에 가서 굳이 왕관을 쓰려하지 말고, 나한테 맞는 가벼운 왕관을 내가 구하면 될 것 아닌가.


최근 전광훈 목사가 ‘교인들 1,200만 명을 데리고 캐나다에 가서 독립 국가를 건설할 것’이라 야외 예배에서 공언했다고 한다. 뭐 그러든지 말든지. 자신과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 데리고 가서 산다는데 뭐 얼마나 좋아, 시끄러운 사람들도 분리수거되고. 그냥 헌금이나 기부금 삥 뜯고 잠수타지 않기를 바랄 뿐. 그러다 보니까 갑자기 ‘마이크로네이션’(Micronation)이 궁금해졌다. 

마이크로네이션은 매우 작은 지역 내에서 국가의 요소를 갖추지 못한 채 독립 국가임을 주장하는 집단을 지칭한다. 한국에서는 ‘초소형 국민체’라 번역하는데 사실 이 말은 별로 느낌이 살지 않으니 그냥 마이크로네이션이라 하자. 현재 세계적으로 100개가 넘는 마이크로네이션이 존재하고 있는데, ‘나미나라 공화국’으로 불리는 ‘남이섬’ 역시 놀이형 마이크로네이션이라 보기도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마이크로네이션 헛리버 공국의 국기. 이젠 망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는 마이크로네이션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헛리버 공국’과 영국의 ‘씨랜드 공국’이다. 이들 나라는 대부분 관광이나 기타 부수입으로 먹고살고 있는데 헛리버 공국은 2020년 코로나19 사태로 국경이 닫히며 소멸하고, 이제 유명세가 남아있는 곳은 영국 부근의 ‘씨랜드 공국’ 뿐이다. 

씨랜드 공국의 영토. 한 100평쯤 된다고. 

씨랜드 공국(Principality of Sealand)은 영국이 세계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군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요새 중 영해 밖에 있는 것 하나를 1967년 해적방송 운영자 패디 로이 베이츠가 무단 점령하며 살게 된 것이 시작이다. 패디 로이 베이츠는 자신과 그 가족 등 총 4명은 자신들을 ‘베이츠 공가’라는 귀족으로 스스로 즉위하며 독립선언을 하고 국가를 선포했다. 


영국은 이들을 쫓아내기 위해 왕립 해군까지 파견하지만 총을 쏘며 격렬히 저항하는 통에 퇴거시키지 못했다. 영국 정부는 결국 재판까지 걸었지만 당시 기준으로 씨랜드 공화국이 영국 영해 밖이라 영국 사법권의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이후  영해 범위가 12해리로 늘어나 씨랜드 공국이 영국 영해 내에 들어왔지만, 영국 정부는 귀찮았는지 어쨌는지 굳이 몇 명 되지도 않는 이 나라를 건들지 않았다. 그때부터 이들은 마이크로네이션의 위치를 유지하며 살아가게 된다. 

씨랜드 공국의 건국 50주년 기념일에 SNS에 올린 기념사진. 저 중 한 명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그런데, 이 나라같지도 않은 나라에 일어날 일은 모조리 일어났다. 씨랜드 공국은 1978년 외적의 침입에 맞서 전쟁까지 치르게 된다. 당시 사업차 방문한 네덜란드와 독일인이 패디 로이 베이츠 공작과 조안 베이츠 공비가 영국에 가있는 동안 그들의 자식들을 인질로 잡아 씨랜드 공화국을 무단으로 강탈하려 했던 것. 심지어 네덜란드 인 중 한 명은 씨랜드 공국의 총리였다!! 

그러나 패디 로이 베이츠 공작은 숨겨둔 무기를 들고 가족들을 용병으로 삼아 헬리콥터 강습 작전을 펼쳐 외적을 진압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이때 포로로 잡혀있다 풀려난 총리 등 네덜란드 인들은 지금도 씨랜드 공국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씨랜드 공국을 공화국으로!’를 외치며 공국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보수하고 수상 공중 항로를 개척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망명 정부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그 망명정부는 홈페이지까지 있음.

씨랜드 공국 최악의 위기였던 영토 화재 당시

2006년에는 낡은 발전기에서 화재가 나 공국이 통으로 타버릴 위기에 처했지만 영국 공군이 구조하면서 큰 문제없이 화재를 진압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씨랜드 공국이 1200억 원 정도의 매물로 나와 몇몇 사업가들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지만 교통이 너무 불편하다는 이유로 협상이 결렬되며 공국은 아직까지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는 초대 공작인 패디 로이 베이츠가 노환으로 사망했는데, 씨랜드 공국은 입헌군주국! 인 만큼 장남 마이클 베이츠가 공위를 승계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들의 수입원은 홈페이지에서 기념주화와 우표를 파는 것인데 몇 년 전부터는 작위를 팔아 쏠쏠히 재미를 보고 있다.심지어 영토까지도 팔고 있는데, 저기서 뭘 얼마나 떼어줄라고...  한국에서는 한 웃대 유저가 33만 원쯤 하는 백작, 기사단에 가입한 한 블로거를 제외하면 주로 대부분 9만 원쯤 하는 남작(Baron)과 3만 원쯤 하는 귀족(Lord/Lady)이다. 그나마 얼마전부터는 귀족과 남작이 통합되어 같은  가격이  되었다. 


뭔가 중요한 문서 같은데.... 우측 우표가 씨랜드 공국....... 아..... 술이 웬수다

오늘 원고를 모두 마치고 잠시 밖에 나가서 커피 한 잔 때리다 우체통을 확인하니 웬 우편물이 하나 날아와 있다. ‘Royal Mail’? 이건 영국인데… 음, 이 우표는 뭐지… 씨랜드… 음? 씨랜드? 씨랜드 공국?

그럴싸한 공문서 양식을 갖추었다. 

차츰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하고… 술 먹고 마이크로네이션 콘텐츠를 읽다 씨랜드 공국 쇼핑몰을 보면서 낄낄거렸던 게 기억나는데, 그 정체불명의 파운드화 결제가 이거였구나. 하드보드지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니...... 엄마 나 남작 먹었어!!!!! 아, 이거 아닌가. 술이 웬수지… 매관매직 별거 아니구먼. 

그냥 말이 멋져 보인다고 작위 대신 Lord를 고른 괴랄한 센스 하고는...

‘Lord Francis Jung-Min Lee’라 쓰여있는 인증서. 미친놈아, 그나마 높은 작위인 Baron이 아니고 왜 귀족의 자식한테 붙이는 Lord를 고른 거냐. 보나 마나 'Yes, My Lord’에 꽂힌 것이렸다….

어쨌든 난 이렇게 씨랜드 공국의 귀족으로 등록하고 한 야매 입헌 군주국의 귀족이 되었다. 인증서에는 마이클 베이츠 대공의 직인이 찍혀있고. 이제 내 주군인건가. 왜 근데 공식 인증은 12월 3일부터인 거지? 아, 그 취한 와중에 세례명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축일로 한 거구나… 아… 술이 웬수다X3,000. 

씨랜드 공국의 역사. 나도 이제 씨랜드 공국 귀족이니 역사 좀 외워줘야 하나. 

이 인증서 이외의 다른 문서들은 씨랜드 공국의 역사와 대소사가 적혀있다. 이제 나도 씨랜드 공국의 귀족이니 이 역사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건가. 나 새끼 술 먹고 심지어 씨랜드 공국 ID카드도 신청했네! 그나마 그건 배송이 안 와서 이메일을 통해 귀족의 불호령을 내리고 다시 발급해주길 요청했다. 매관매직인데 기브앤테이크는 정확해야지. 


언제 내가 저길 가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언젠가 귀족 신분으로 꼭 씨랜드 공국의 땅을 밟아보고 싶다. 총영토가 100평이라는데, 나 잘 데는 있으려나? 하긴 국민이 총 4명이라니 뭐… 잘 데야 없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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