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어쩌다 DJ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ncis Dec 31. 2021

나의 헤드폰 지름 연대기

하지만 중요한건 음악이지 헤드폰이 아니거늘...

한참 음악에 깊이 빠져들던 중학교 시절, 중학교 올라가면서 선물 받은 ‘마이마이’ 휴대용 카세트가 좋아하는 음악을 구하고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듣는 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좋아하는 음악을 구할 수 있냐고? 중학생이 돈이 어딨어. 한 달에 한 번 라이선스 테이프 사기도 버거웠던 당시. 라디오에서 방송되는 음원을 녹음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렇다 보니, 음악을 듣는 도구는 스피커보다는 주로 이어폰이었다. 그것도 휴대용 카세트를 줄 때 기본적으로 받는 번들 이어폰. 

출처: 국립 중앙과학관 자료실

그러나 이 번들형 이어폰의 내구성은 그야말로 최악. 몇 달만 쓰면 코드 부분이 단선이 되거나 LR 둘 중 하나가 들리지 않아 툭하면 고장이 났다. 처음에는 하나에 1만 원 정도 하는 ‘전자상가 이어폰’을 썼다. 하지만, 소니의 고퀄리티 이어폰 MDR-E888을 아는 형한테 선물 받아 써본 후, ‘사람의 취향은 한 번 높아지면 절대 낮출 수 없다’는 법칙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이후는 어떻게든 용돈을 모아 소위 ‘외제 이어폰’을 쓰게 됐고, 경제활동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이어폰과 헤드폰에 약간 집착적인 성향을 보이게 된다. 

뭐 그걸 집착까지 하냐고?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여행 갈 때는 꼭 블루투스 이어폰과 유선 이어폰을 각각 한 벌씩, 헤드폰을 들고 갈 때는 블루투스 이어폰이나 유선 이어폰 중 하나를 챙겨간다. 한 짝을 잃어버리거나 했을 때는 대책이 없는데 그렇다고 아무거나 듣자니 귀가 영 거슬리거든. 2019년 상하이 출장을 갔을 때는 AirPod Pro가 갑자기 충전에 말썽을 일으켜 애플스토어를 뒤져 AirPod을 사서 쓴 적도 있다. 며칠 전 책상을 정리하다 갑자기 내가 지금 이어폰이랑 헤드폰을 몇 가지나 가지고 있을지 갑자기 궁금해져서 정리를 해보았다.  

위 사진의 이어폰과 헤드폰은 총 6종. 이거 여기저기 뒤져보면 한두 개 더 나올 텐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네. 각 제품에 붙여진 숫자는 가지고 있은지 가장 오래된 순으로 붙였으니 요리조리 몇 번인지 매칭 해보는 재미도 있을 듯. (응??) *여기서 이어폰과 헤드폰은 미국에서처럼, 전부 헤드폰으로 통일했다. 

현재 주로 사용하는 헤드폰들

①번 헤드폰은 Beyerdynamic의 모니터링 헤드폰 DT1350이다. 이걸 친한 형에게 선물 받은 게 2012년인가 그랬던 거 같은데, 당시 거의 최초로 ‘테슬라 드라이버’를 유닛에 사용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제품이다. 테슬라 드라이버는 일단 자력이 겁나 쎈 자석이 들어있으니 진동판을 아주 섬세하게 컨트롤 할 수 있어 사운드도 섬세하다는 뜻이렸다. 

일단 나 같은 대두에게는 좀 작아 보여도 그럭저럭 맞게 착용할 수는 있다. 헤어밴드가 90도로 벌어지는 것도 대두 맞춤 서비스 같은 느낌. 

사운드는 이걸 빌려갔던 친구가 표현한 것처럼, 독일 병정처럼 정확하고 디테일한, 소위 각이 나오는 사운드를 들려준다. 금속제 헤어 밴드가 양쪽 귀를 잘 틀어막아주다 보니 차음성도 좋은 편. 주로 라이브 PA를 하거나 믹스를 할 때 사용했는데, 다만 나는 머리가 초큼 큰 관계로 한두 시간 작업하고 나면 관자놀이가 아프더라. 


②번 헤드폰(왼쪽)은 뭐 물어볼 필요도 없는 AirPod Pro. 아무래도 본투비 앱등이다 보니 2019년 11월 13일 출시된 그날 바로 신사동 애플스토어로 달려가 확 지르고 AppleCare+까지 결제. 당시 그렇게 하니 거의 35만 원 정도의 가격이었는데 처음 페어링해 들어본 그날부터 최애 헤드폰이 되었다. 인이어에 노이즈 캔슬링 기능도 짱짱하니 우당탕탕 시끌시끌한 2호선에서도 끄덕 없이 iPhone 풀 볼륨의 절반 정도에 조용한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뭐 음질이야 돈값은 하고. 이걸 쓰니 그냥 AirPod은 못쓰겠더라. 그런데, 언제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나.

⑥번 헤드폰(오른쪽)은 새로 나온 AirPod 3 시리즈. 오픈마켓에 뜨자마자 뭐에 홀린 듯이 질러버렸다. 이전 모델에 비해 귀에 밀착성이 좋아지고 헐겁게 빠지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물론 가격도 초큼 올라갔고. 귀와 잘 맞지 않으면 새어나가던 소리들도 잘 모아서 귓구멍으로 전달해 주니 많이 단단해졌다. 

그러나 택배를 받아 페어링해 들어보니, 사실 AirPod Pro가 있다면 이걸 굳이 왜 사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오픈형이라 볼륨도 많이 올려야 하고 지하철, 특히 5호선에선 짤 없음. 결국 방출하기로 결정했다. 


③번 헤드폰은 한국에서 그래도 헤드폰 잘 만든다고 소문난 소니캐스트의 브랜드 ‘direm’의 이어폰을 ‘한국 음향 엔지니어 협회’(KISA)가 모니터링이 가능한 레벨로 튜닝한 인이어 모니터링 헤드폰이다. 음향학과 학생들이 실습에 사용할 수 있는 저렴한 레퍼런스 모니터링 헤드폰을 만들겠다는 목표 하에 만든 이 녀석은 정위감도 좋고 차음성도 좋아 실제 모니터 작업에 투입되기도 충분하지만 그냥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특히 음향적으로 완벽하다는 Steely Dan의 <Gaucho>나 Toto의 <Rossana>, 비교적 요즘 음악인 DaftPunk의 <Lose Yourself to Dance> 같은걸 들어보면 이거 좀 괜찮구나 하는 생각이 들 듯. 가격도 7만 원 이하로 저렴한 편이다. 단, 이건 KISA에 등록된 엔지니어나 전국의 음향 관련 학과 학생들만 구입할 수 있다. 


④번 헤드폰은 Aftershokz에서 출시한 무선 헤드폰 ‘Aeropex’라는 녀석이다. 이 제품의 가장 큰 특징은, 골전도 방식이라는 것. 골전도 방식은 드라이버 유닛으로 귀를 막지 않고도 머리뼈와 피부의 진동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음의 전달력이 떨어지고 사람에 따라 멀미를 느끼기도 한다. 거의 1주일에 세네 번은 따릉이를 타고 을지로와 종로, 홍대를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AirPod Pro 같은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다니긴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 녀석을 들였다. 

Aeropex는 AfterShock 진동 방식을 채택해 저음이 잘 들리는 것 같은 느낌적인 필링을 전달해준다. 이가 진짜 깊은 저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귓바퀴 속을 때리는 느낌은 좀 전달해 준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IP7 방수를 지원하는 만큼, 등산을 하거나 트레킹을 하는 등 땀을 뻘뻘 흘리고 빗속을 걸어 다녀도 고장이 나거나 하지 않는다. 


요런 블루투스 타입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의 왕좌는 BOSE와 SONY가 양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소니가 외계인이라도 잡아 왔는지 노이즈 캔슬링 성능이 갑자기 일확천… 아니 일취월장하기 시작하면서 무게추는 SONY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최근 Sennheiser도 발군의 퀄리티를 보이고 있지만 아직 선발 주자에 비해서는 역부족. 원래 사용하던 건 SONY의 WH-1000XM2. 사실 그 녀석만 해도 충분히 훌륭했다. 하지만 친구 녀석의 후속 모델인 WH-1000XM3 자랑에 호승심이 올라온 나는 그 상위 모델을 지르고 만다. 

그게 바로 ⑤번 헤드폰.  WH-1000XM4는 헤어 밴드가 많이 편해졌고 이어컵 역시 전 모델에 비해 가죽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360 리얼리티 오디오’를 지원한다 하는데 뭐 서라운드 영화를 보지 않는 이상, 음악만 듣는 나로서는 사실 뭐가 좋은지를 잘 모르겠다. 그런데, 신체 중 한 두 부위만 더워지면 땀이 나는 나인지라 마스크에 헤드폰까지 뒤집어쓰니 특히 귀와 입을 비롯한 얼굴에 땀이 펄펄 나서 현재 잘 안 쓰고 있음. 아까버라….


와. 진짜 많이도 질러댔다. 그동안 갈아치운 헤드폰들을 세보면 어림잡아한 20종은 되지 싶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확실히 좋은 헤드폰과 이어폰들이 음악 본연의 소리를 그대로 들려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소리는, ‘얘 음악만 듣고 공부 안 한다’며 마이마이와 탁상 라디오를 모두 압수한 상황에서 친구가 빌려준 휴대용 라디오로 듣던 FM 방송에서 들려온 The Chi-Lites의 <Have You Seen Her>에서 들리는 지글지글한 퍼즈 기타와 보컬 하모니였다. 애초에 우리가 원한 건 노래지 단순한 좋은 소리가 아니니까. 이제 좀 장비 다이어트하고 음악 본연의 가치에 집중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혈관 타고 흐르는, 내가 겪지도 않은 추억의 노스탤지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