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mas Time Again - Extreme
징글벨’, ‘화이트 크리스마스’ 등 다들 ‘크리스마스’ 하면 생각나는 노래들이 있겠죠. 하지만 난 좀 다른 노래를 떠올립니다.
아마 고2쯤 되던 크리스마스 날. 여느 때와 같았어요. 늘 그래왔던 것처럼 10시쯤 크리스마스 성야 미사를 드리고 부모님이 기념 여행을 가셔서 마침 비어 있던 준완이네 집으로 향했어요. 집에는 준완 어머님이 해놓고 가신 불고기와 육개장, 김밥 등 먹을거리가 가득했습니다. 꽤 노안이었던 석형이는 늦게까지 열려 있는 슈퍼에서 맥주와 소주, 음료를 잔뜩 사왔어요. (당시는 신분증 검사나 단속도 그닥 심하지 않았거든요.)
비디오로 <나홀로 집에>를 틀어놓고, 예닐곱 명이 모여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며 내년 고3 때는 어떻게 될지 기대 반 불안 반 섞인 대화를 나누던 중, 외박이 안 되는 사람과 남/여친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몇 명 남자들만 모여 취한 채 잠이 들었어요.
그때도 노인네 체질인데다 내 방이 아니어서 그런지 새벽 6시에 눈이 떠진 나.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 같은 게 막 되는 것도 아니어서 별로 할 일이 없더라고요. 책 보려고 불을 켜니 친구들이 지랄을 하고… 그래서 친구의 카세트 데크에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나 듣기로 했습니다.
마땅히 들을 방송이 없어 ‘오성식의 팝스 잉글리시’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팝송으로 영어 공부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라도 너무하더라고요.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관용어구가 어쩌고 부정사 용법이 어쩌고 ‘even if’를 어떨 때 쓰고 등등…. 잠이 올락말락 할 때, 갑자기 잠이 확 깨는 노래가 하나 흘러나왔습니다.
분명히, 당시 내가 홀릭하던 록 밴드 ‘익스트림’(Extreme)의 보컬 게리 세론(Gary Cherone)과 기타리스트 누노 베텐커트(Nuno Bettencourt)의 목소리였거든요. 얼른 공테이프를 찾아 녹음하기는 했는데, 타이밍이 늦은 만큼 앞부분은 이미 잘렸고… 끝난 후에도 노래를 부른 아티스트와 제목은 소개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날 방송국에 전화해 제목을 물어보려니, 제가 요령이 없어서 그런지 ‘오성식의 팝스 잉글리시’ 팀으로 연결해 주거나, 전화번호를 남겨주시면 연락 드리겠다거나 뭐 그런 말도 없더라고요. 인터넷도 없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라 어디 검색을 해볼 수도 없고… 되도 않는 영어 듣기 실력으로 가사를 적어 서울 레코드점 여기저기를 뒤졌지만 결국 찾지 못한 채 그렇게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냥 후렴구를 슬쩍 들어보니, 제목이 ‘Christmas Time Again’이라는 정도만 짐작할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어리바리 대학에 간 나는 밴드 동아리 활동을 하며 더 많은 음악들을 접했는데요. 동아리 친구들과 선후배들에게 죄다 물어봐도 이 노래가 수록된 음반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처음 알게 된 레코드점이라면 무조건 가보는 ‘디깅’ 역시 계속하는 절 친구가 보고는 이렇게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야. PC통신 익스트림 팬클럽 같은 데 가입해봐!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직전인 1997년. 당시 PC통신은 얼리어답터와 인싸들이 모여 자기가 가진 지식과 정보를 자랑하는 ‘지금의 SNS’ 비슷한 역할을 했고, 그곳에서 익스트림의 팬클럽에 가입해 죽어라 활동한 끝에 자료실 접근 권한을 얻어, 마침내 그곳에서 그 노래에 대한 정보와 MP3 파일을 찾아낼 수 있었어요. 제목은 제 짐작이 맞더라고요. ‘Christmas Time Again’.
이 노래는 장애인 올림픽인 ‘스페셜 올림픽’을 위해 여러 뮤지션들이 모여 만든 ‘A Very Special Christmas’의 두 번째 앨범에 수록된 곡이었고요. 보이즈 투 맨, 본 조비, 마이클 볼튼, Run-D.M.C 등 당대 팝스타들이 모두 참여한 이 앨범에 익스트림도 한 곡을 얹었더라고요. 지금이야 불법이지만, 당시 저작권 개념도 희미하던 시대, 어떤 회원이 그 CD를 구해 파일을 자료실에 올려놓았고, 제일 느린 모뎀을 쓰던 나는 거의 이틀에 걸쳐 5MB 정도 되는 그 파일을 내려받아 크리스마스 때면 마르고 닳도록 들어댔습니다.
생각해보니, 이게 제 음악과 음반 덕질의 시작인 셈이었어요. 이때부터 전 정말 좋아하는 노래는 CD나 LP로 꼭 사는 습관이 생겼거든요. 그런 마음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음악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고, 밴드에서 기타를 치고 어떻게든 음악 관련 업을 이어가려 노력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집요하게 음반을 찾는 마음’이 내가 크리스마스 때 받은 가장 소중한 선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기분을 계속 유지하면서, 좀 이따 성탄 미사를 드리고 한 잔 해야겠어요.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