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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Dec 16. 2020

좋아하는 걸 하지 말고, 잘하는 걸 해

세상에 꼭 그래야만 하는 게 얼마나 됩니까?

영화 <VIP>에서 자꾸 탈북자 사이코패스 살인마 김광일(이종석 분)에게 집착하는 국정원 요원 박재혁(장동건 분)에게 상관인 국정원 고위 간부(주진모 분)가 일침을 날린다. 


좋아하는 걸 하지 말고, 잘하는 걸 해
출처: 다음 영화  - VIP  페이지

그렇다. 사람이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 아, 선비 같은 소리 집어치우자. 사람이 일해서 먹고살려면 잘하는 걸 해야 한다는 건 누가 봐도 진리다. 내가 아무리 미술을 사랑하고 화가가 되고 싶지만, 졸라맨 같은 그림밖에 못 그리면 그걸로 뭔 돈을 벌겠나. 인생은 실전이다.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으려면, 조금이나마 그럴싸한 뭔가를 줘야 하는 법. 그러려면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난 왜 저 말이 이리 거슬렸던 걸까.


학부시절 학교 취업 박람회에서 얼떨결에 한 작은 신문사에 지원해 어찌어찌 합격해 직원 연수를 앞두게 되었다. 그런데, 그 노무 졸업 작품이 문제였다. 당시 공대 졸업반이었던 나는 졸업 작품 제출을 하지 않은 상태. 마감은 연수 기간 중이었다. 담당 교수님은 작품을 제출하고 연수에 들어가라는 원론적인 답변을 할 수 밖에 없었고, 회사 역시 연수를 참여하지 못하면 채용은 취소될 것이라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취업을 포기했고 그 직후,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싶어 졌다. 미친 듯이.


어찌어찌 졸업작품을 해결하고 언론사 채용을 알아봤지만 3.0을 간신히 넘은 꼴통에게 메이저 언론은 애초에 택도 없는 소리. 학부 때 교내 사진대회 동상 경력으로 여기저기 문을 두들겨 ‘SoundArt’라는 자그마한 음악/음향 전문지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연봉 1,200만 원에 그나마 그것을 13으로 나눠 보너스처럼 지급한다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처우는 아무래도 좋았다. 음악 관련 글을 써서 생계를 꾸릴 수 있다는 것이 좋았고 뮤지션과 엔지니어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저 좋은 철부지였달까. 그 안에서 있었던 믿기지도 않게 황당한 일들은 나중에 술 한잔 때리고 이야기해주련다.


당시 잡지가 모두 인터넷으로 이동하던 시절, 상황이 어려워진 회사는 아예 영업부를 없애고 취재 기자들에게 영업 업무까지 맡기기 시작했다. 그것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나는 입사 10개월 만에 당당히 사직서를 던지고 회사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것이 어디 가서 경력 사항에도 싣기 짧고도 부끄러운 사회생활의 시작이었다. 

놀면 뭐하니? - 인생 라면 에피소드 중. 아... 지금도 버티고 있지만, 진짜 다들 버티느라 수고가 많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  컴퓨터 전공에 대표작도 없는 꼴랑 10개월 차 햇병아리 작가를 받아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이곳저곳 이력서를 넣으며 아르바이트로 거지처럼 살다 보니,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컴퓨터 관련 일을 알아볼까? 라는 생각마저 들어 친구들에게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던 중 친한 선배가 갑자기 우리 집 앞으로 찾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사람. 그동안 살아왔던 에피소드, 추천하고 싶은 음악, 밴드 이야기 등등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은 훌쩍 지나갔고, 집에 가려던 선배는 갑자기 차를 세우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야.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지. 
그런데, 정말 하기 싫은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냐?


그 한마디에 나는 글밥만 먹기로 마음을 고쳐먹고  한국 잡지교육원의 6개월 차 교육을 수료한 다음 애플 디바이스 전문지 ‘맥마당’ 기자를 거쳐 SK텔레콤, 하이트진로, 현대로템, CJ엔터테인먼트 등 홍보 콘텐츠를 만들며 살고 있다. 여기서 히트, 선배는 그 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남에게 하는 말 한마디가 이렇게 중요하다.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내 한마디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도 있다. 내가 경험이 많다고, 더 오래 살았다고 다 안다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경계해야겠다. 어차피 라떼도 잘 안 먹는 인생, 지인들한테까지 굳이 라떼를 찾을 필요는 없지 않나. 

귀에서 피흘리게 해드려 ㅈㅅ  출처: tvN 드라마스테이지 - 귀피를 흘리는 여자

그래도 나는 옛날 사람이니, 이 글에서 라떼 한 잔 마시련다.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안전하기도 하고. 하지만 세상에 꼭 그래야 하는 게 얼마나 되겠나. 꼭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한 번쯤 밀어붙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좀 못하면 어때? 단박에 유시민 작가나 안수찬 기자, 허지웅 작가처럼 멋들어진 문장을 쓸 수는 없겠지만 근본 없는 글팔이인 나도 이 짓을 10년 넘게 하니 아주 조금은 늘더라. 그러니 다들, 하고 싶은 것 하고 사시라. 아, 라테 다 마셨으니 오늘은 이만.


#한달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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