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안 받아도 되었을 유격훈련의 추억
PX병의 정확한 명칭은 ‘복지관리병’이다. 훈련과 전투 상황을 제외한 병력의 쉬는 시간에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PX병의 의무. PX에는 사회의 매점과 같은 다양한 음식과 문구류, 비누와 치약, 칫솔 등의 생활용품은 물론 속옷이나 양말 같은 것도 있다. 부대에 따라 노래방이나 게임기를 운용하기도 한다.
지난번 콘텐츠 ‘PX병 최고 장점은 No 훈련도, No 작업도 아닙니다’에 잠깐 언급한 것처럼 PX병은 원칙상 보급 부대인 ‘국군 복지단’ 소속이지만 대대 규모 PX병은 보통 부대 내 인원 중 적당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보통이라 대대의 통제를 받게 된다. PX병은 기본적으로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일과 시간 훈련은 모두 열외가 되고 PX에서 근무한다.
하지만 대대 병력이 모두 출동하는 ‘대대 종합전술훈련’이나 ‘혹한기 훈련’ 같은 경우는 PX병도 얄짤 없이 문을 걸어 잠그고 출동하게 된다. (포병의 경우) 부대 위로 포탄이 날아온다는 가정 하에 재빨리 산개해 진지를 구축하는 ‘화스트 페이스’(Fast Pace) 같은 짧은 훈련은 늘 위병소 옆에 짱박혀 있는 PX병에게는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군사 훈련 중 가장 빡세다고 하는 ‘유격 훈련’의 경우 출동은 하지만 짐을 싸서 훈련장에 이동 PX 차려 운영하고 훈련은 뛰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것만 해도 어디냐…. 나는 운 좋게(라는 말은 좀 미안하지만) 부대 부근 수해가 심해서 PX병이 되기 이전 첫 번째 유격을 수해 복구로 때웠다.
게다가 제대하던 해 6월에는 비가 와서 유격 훈련 출동하던 것을 취소하고 전 병력이 수해 복구에 투입되었다. 나야 PX병이라 어차피 훈련은 하지 않겠지만 사병들 입장에서는 이게 웬 떡이냐… 그런데 갑자기 사단장이 마음이 바뀌었는지 취소하기로 했던 유격 훈련을 9월에 부활시켜 버렸다. 게다가 ‘어떤 보직이건 기본은 모두 군인’이라며 ‘전 군의 전투요원화’를 강하게 주장해 열외 병력 없이 모든 사병이 유격훈련을 받도록 명령했다. 그렇다. 그동안 룰루랄라 하던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보통 PX병은 훈련을 거의 나가지 않기 때문에 보통은 가벼운 합성수지로 제작된 방탄 헬멧 대신 (보통 ‘화이바’이라 줄여 부른다) 구구구구구구형인 철제 제품으로 지급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막상 훈련을 나간다니 도저히 철모로는 무리가 있어서 화이바와 군복 등을 관리하는 ‘이사종계’ 보직 상병을 찾아갔다. 당시 제대가 3개월 남짓 남은 나는 부대 내 사병 서열 3위.
이사종계: 통일! 이 병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나: 이사종계 창고 열어라. 화이바 좀 바꿔가자.
이사종계: 안되지 말입니다.
나: @#%#@$%#$야. 안 되는 게 어딨냐. 퍼뜩 창고 못여냐
만류하는 이사종계를 밀치고 들어가 가장 가벼운 화이바와 철모를 바꿔온 나는 의기양양했다. 이제 좀 버틸만하겠구먼. 훈련장에서 PX 열 준비를 마친 트럭은 먼저 보내고, 그냥 군 생활의 마지막 추억이다… 하고 행군해 걸어간 유격장. 이제 유격 훈련을 위해 위장포를 벗길 시간. 보통 화이바의 위장포를 벗기면 까만색이 나와야 한다.
응? 근데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여기서 왜 안전모가 나오는 거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지만 육군 보급품이 망실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것을 꼭 정당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어떤 꼼수로 숫자만 메꿔 놓는 경우가 있나보다. 갑자기 육군 검열이 뜰 경우 개수가 모자라면 행보관이 옆 부대 가서 잠깐 빌려다 수량을 맞춰 놓는 경우도 왕왕 있었는데…. 언제인지 모를 과거에 이사종계나 행보관이 안전모에 위장포를 씌우고 속에만 까만 칠을 해 놔둔 건가보다. 그래서 사병에게 불출을 안했던거고. 이사종계 새끼... 그래서 안된다고 말린건가.
그나저나 난 꼼짝없이 300명 의 까만 화이바 가운데 혼자 노란 화이바를 쓰고 PT체조를 받는 유격장으로 향해야 했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가운데 ' 삑, 삐빅, 삐비익~' 호루라기와 함께 PT 체조가 시작되고… 곧이어 교관의 호통이 터져 나왔다.
야 노란 화이바 나와!!
가뜩이나 평발에 발가락 기형으로 체력이 달리고 포즈도 이상한 나. 그런데 무슨 강조 포인트마냥 나 혼자 노란 화이바로 존재감을 뿜뿜하고 있으니 불러내기 딱 좋지. 나는 PT체조 내내 수시로 열외를 당해야 했고 코스에 가서도 ‘노란 화이바, 넌 뭐야. 나와!’를 당해야 했다.
하루 종일 박박 기다 내려와 샤워 좀 하고 쉬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대대장이 찾아와 나를 찾는다.
대대장: 이정민이 이제 뭐하나
나: 이제 샤워하고 휴식 좀 취하려 합니다
대대장: 맨날 과자 파는 새끼가 훈련받는다고 유세 떠나, 야 피돌이. 장사 안 해?!!!
대대장이 개무시하며 일깨워준 내 본분 덕에, 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바로 이동 PX를 열어 9시까지 장사를 해야만 했다. 유격 조교들이 PX를 찾아와 사연을 들어준 덕에, 그다음 날부터는 좀 열외를 덜 당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이렇게 나는 군생활의 유격훈련을 아주 짙게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격훈련의 에피소드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다음 회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