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구잡이 여행이 만나게 해준 고마운 인연
지난번 ‘그거 알아? 일상은 모두 여행이야’ 콘텐츠에서 잠시 나의 여행 습관에 얽힌 스토리를 공개한 적이 있었다. 2012년 막무가내로 떠난 도쿄 여행에서 ‘라이브 클럽이 많은 신주쿠’라는 말을 헷갈려 저녁 내내 시부야를 헤메다 발견한 뮤지션 ‘히구치 아이’. 영어는 잘 못하지만 친절하게 데모 EP에 사인을 해줬더랬지.
2014년 3월, 왕복 10만 원도 안되는 싸구려 비행기 표에 혹해 갑자기 떠난 오사카를 거닐다 남바역 부근의 타워 레코드를 들어가보니, 오호… 어느새 히구치 아이의 정식 음반이 세상에 나왔구나… 얼른 음반을 집어들고 계산을 하니 뭔가 일본말로 조또마떼아리가또쓰메끼리 적혀있는 쪽지를 주는데 당최 무슨 말이 적혀있는고… 알아볼 수 있는건 ‘握手券’라는 세 글자 뿐이었다. 악수권? 이게 뭐지? 숙소로 돌아와 일본어 잘 하는 친구에게 그 쪽지를 찍어 보내니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ヒグチアイ」の最初のアルバム
‘히구치 아이’의 첫 앨범
初版500枚以内のアルバムを購入した方は、
초판 500장 이내 음반을 구입하신 분은
5月6日ミュージシャンのミニライブと
5월 6일 뮤지션의 미니 라이브 및
握手会に参加することができます
악수회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악수회는 우리나라 말로 치면 사인회? 이게 왠 떡이냐? 그날은 내가 출국하는 날이긴 하지만, 9시 비행기니 시간은 충분충분. 이게 무슨 재밌는 인연이냐!
그냘 출국할 짐을 싸서 다시 타워레코드로 가보니 키보드와 함께 라이브 셋이 차려져 있고, 쪽지를 보여주고 라이브 공간으로 들어가자 마자 그녀가 노래를 시작했다. 알수 없는 일본말 멘트와 함께 내리 일곱곡을 부르는데, 데모 EP에 있던 곡도 도 좋았지만 새로운 곡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구나. 마치 덕질하러 오사카까지 온 것 같고 기분이 묘하고도 좋았다. 일본 악수회는 사인도 사인인데 진짜 악수까지 한다. 다가오는 나를 본 히구치 아이 상. 가뜩이나 큰 눈을 크게 뜨더니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면서 ‘아노… 라이브 하우스 지지, 코리아, 코리아’ 이러며 씩 웃는다. 말은 안통하지만 알아보기는 알아보는 걸 보니 기분이 좋구만.
스마트폰 번역기를 통해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너무 기분이 좋아 사진 한 장 같이 찍기를 청하니 ‘샷싱… 노’ 아 맞다. 사진 찍는거 싫어하는 타입이지. 죄송합니다. 기분 좋게 악수만 하고 눈빛으로 인사를 했다.
이후 2015년 4월 다시 무작정 도쿄로 떠났던 어느날, 언제나 그렇듯 아무 준비를 안해와서 첫날 도쿄에서 뭘 할지 찾아보던 중 도쿄 근처의 ‘고엔지’라는 곳에서 작은 록 페스티벌이 열린다는 뉴스를 찾았다. 예매를 하려 하는데 뭐가 어떻게 되는지, 무슨말인지 잘 이해도 안가고 제대로 번역을 할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중 갑자기 무작정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 히구치 아이 상한테 DM을 보내볼까?’
나: 히구치 아이 상. 저 오사카 타워레코드에서 인사 드렸던 코리아 팬입니다
히구치상: 아, 기억나요. 반갑습니다
나: 제가 5월에 있는 고엔지 록 페스티벌에 가려고 하는데요.
히구치상: 티켓은 예매 하셨어요?
나: 그러지 않아도 그걸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요. (약 30분 후)
히구치상: 저도 거기에서 공연 하거든요?
티켓 부스에 말해놓을게요.
님 이름 이야기 하시고 찾아가시면 됩니다.
나: 엇, 감사합니다. 티켓 비용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히구치상: 그날 제게 주세요.
오, 의외로 쉽게 해결됐는걸! 오랜만에 히구치 상이랑 이야기한 것도 반가운데 심지어 히구치 상도 공연을 하고 예매까지 도와주다니… 도쿄에서 머문지 사흘째 날 고엔지 록 페스티벌에 참여하기 위해 그녀가 공연하는 카페로 찾아갔다. 고엔지 록 페스티벌은 홍대 클럽데이처럼, 고엔지의 여러 공연장과 카페, 길거리에서 하는 공연을 손목의 패스 하나로 모두 볼 수 있는 그런 페스티벌이었다.
공식 티켓 부스에서 어찌어찌 티켓을 찾은 후 티켓을 받고 히구치 아이에게 티켓 대금을 주기 위해 그녀가 공연하는 클럽으로 찾아가 히구치 아이를 불러달라고 했다. 날 알아보고는 뭐라뭐라 일본어로 이야기하더니 돈을 받고 500엔짜리 동전을 내게 주더라. 응? 왜그러지? 얼른 번역기를 실행해 왜 돈을 내게 주냐고 물어보니 이렇게 답했다.
제 이름을 대고 예약을 하면 당신이 낸 티켓값 중 500엔이 저에게 옵니다.
또 찾아와준게 고마워서 제 몫은 그냥 돌려드립니다.
이런 고마울데가… 당시 돈으로 5천 원 정도.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돈이지만 그날 하루종일 기분이 좋아서 공연을 보고 돌아댕겼던 것 같다. 그 이후 계속 일본 인디신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2015년 보다 큰 기획사 소속으로 메이저 데뷔 앨범 ‘全員優勝’을 발매하면서 더이상은 트위터 DM으로 연락이 닿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일본 뮤지션과 생긴 몇 번의 우연과 그 사이에서받은 친절 덕에, 그녀는 일본에 갈 때마다 추억에 웃을 수 있는 고마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노래는 내가 오사카에서 구입한 그녀의 인디즈 데뷔 앨범 ‘三十万人’ 앨범의 마지막 곡인 <ホームタウ>(Hometown) 이라는 노래다. 이 앨범의 제목인 ‘30만명’ 자체가 도쿄의 조그마한 동네인 ‘야마노’의 인구를 나타내는 것인데, 특히 이노래는 자기 고향인 야마노에 대한 추억을 담담히 노래한 것이라고 일본어를 하는 친구를 들들 볶아 알아냈다. 하지만 가사를 몰라도, 이 노래의 제목이 ‘고향’이라는 것만 알 수 있다면 전해지는 묘한 그리움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한동안 일본이고 뭐고 해외는 나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사모은 음반들을 들으며 맥주를 한 잔 기울이다 보면 그 설레였던 그곳에서의 기분을 조금은 재현해 볼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이렇게 내 수집벽이 고마웠던 적도 별로 없다니깐. 오늘 주말 맥주 안주는 히구치 아이 상의 음악으로 정했다.
*p.s 이 글을 업로드하고 갑자기 추억이 차올라 혹시나 하고 잘 지내냐고 트위터 DM을 보냈더니 '저는 잘 지냅니다. 얼른 상황이 좋아져서 공연장에서 뵙길 바랍니다. 건강하세요.'라는 답이 왔다.
히구치 아이는 시부야와 신주쿠 라이브 클럽과 버스킹 등 밑바닥부터 라이브를 시작해 그야말로 아래부터 차근차근 올라와 메이저로 데뷔한, 유치한 표현이지만 '실력파' 뮤지션입니다. 한참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東京事変'(Tokyojihen)의 영향을 짙게 받은 듯 한 변칙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음악 스타일에 서정적인 멜로디와 코드가 인상적이에요. 혼자서 피아노 치면서 몰아치는 곡들도 좋지만 밴드 세트도 흥미롭습니다.
그녀의 음반은 ‘三十万人’을 제외하면 한국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서비스하지 않고 있습니다. 유튜브에도 예전 노래는 많지 않고요. 혹시 그녀의 음악을 듣고 싶은 분이 있으면 제게 메일이나 댓글 등으로 연락 주세요. 도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