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한 날마시니 또그런 게 아닌 거같기도 하고
마시면 취하는게 술의 기본적인 효능인거야 팩트지만, 술마다 서로 다른 기능이 있다는 생각을 이전부터 하고 있었다. 아페리티브니 건배니 이런거 말고, 술마다 마실 때 좀 기분이 달라진달까.
‘불타는 금요일에는 꼭 치러야 하는 의식’이라는 글을 업로드한 적이 있다. 술을 가리는 타입은 아니지만 희한하게 맥주를 마신 다는 건 술을 마신다기보다 뭔가 삶에 잠깐 쉼표를 찍고 쉬어가는 느낌이다. 왜 그런지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그저 맥주만 줄곧 마셔댔지만 조금 전 불금 맥주를 따르다 ‘휴식의 맥주’라는 감정의 원인을 떠올려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편의점에 들어가 버드와이저 두 병을 샀다. 당시는 신분증 검사도 철저하지 않았던 데다 지금 얼굴이 그때 얼굴일 정도로 노안이라 별로 힘들이지 않고 맥주를 살 수 있었다. 조마조마 누가 볼세라 가방에 넣고 동네 놀이터로 가 가방에 있던 철제 필통으로 병뚜껑을 따 꼴깍꼴깍 마셨더랬다. 뭔가 찝찔하고 쓴 탄산수 같은 게 넘어가는 기분이 별로였는데 조금 있으니 뭔가 가슴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더라.
이때다 싶어 당시 미쳐있던 Jesus Jones의 <Right Here Right Now> 테이프를 워크맨에 넣은 후 두 번째 병을 땄다. 그때부터 술 좋아하는 싹수가 보였는지, 맥주 두 병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별 추태를 부리지는 않았지만, <Right Here Right Now> 노래를 왜 사이키델릭 하다고 이야기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게 인생 첫 맥주였다. 그다음 날은 유난히 상쾌하게 아침을 맞았고 진짜 푹 쉰 기분으로 다음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뭔가 갑갑한 일이 있거나 생각할 일이 있을 때는 종종 혼자 맥주를 마셨던 것 같다.
뭐든 첫 기억이 이후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지배한다 했던가? 이후로 나는 맥덕이 되었다.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나이가 되어서는 정말 툭하면 맥주를 마셔댔던 것 같다. 처음에는 그냥 흔히 이야기하는 라거 맥주만 주야장천 마셔댔지만 이후 맥주 맛을 조금씩 구분하게 되고 주머니 사정도 넉넉해지면서는 라거 말고 다양한 맥주에도 도전하게 되었다. 뭔가 좋은 일 있을 때마다 마셔대다 보니 맥주와 얽힌 재미있는 추억도 많다.
2013년이었던가? ‘위저’가 온다는 말에 또 앞뒤 보지도 않고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 티켓을 끊었다. 하지만 흥분하면 덜렁대는 성격 탓에, 숙소 예약을 잘못해 첫날 하루는 꼼짝없이 어디 빌붙거나 날밤을 새야 될 형편. 첫날 위저 공연은 앙코르 덕에 11시를 넘겨 끝나 집에 돌아가는 버스도 놓친 상황. 에라 그냥 술이나 마시자 하고 맥주를 사러 가던 차에 낮에 잠시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영국인 에디가 말을 걸어온다.
헤이, 너 잘데 없다 했지? 그럼 우리랑 술이나 마시고 내 텐트에서 자.
뭐 영어에는 조금도 자신이 없었지만 이때 아니면 언제 내가 외국애들이랑 걸판지게 놀아보겠냐는 생각에 일단 합류. 에디의 텐트로 가니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 등 온갖 국적의 청춘들이 이미 걸판지게 술판을 벌이고 있다. 동양인은 나 하나. 에라 모르겠다. 파도타기를 제안하며 그 녀석들의 보드카와 와인을 축내다 보니 슬슬 다시 맥주가 마시고 싶어져 자리에 일어났다. 맥주를 사러 가려는데 갑자기 에디가 어디 가냐며 날 붙잡더라. ‘맥주 좀 사러 간다. 너도 마실래?’ 하니까 이 녀석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맥주를 왜 사 먹냐!’며 야단을 치고 자기를 따라오란다. 그 녀석을 따라간 곳은 메인 무대 근처 맥주 매점. 그러더니 갑자기 플라스틱 컵을 하나둘 주우면서 나 보고도 얼른 따라 주우란다. 그제야 매점 앞의 안내문이 내 눈에 들어왔다.
플라스틱 맥주컵 10개를 주워 가져오시면 맥주 한 잔을 드립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에디와 둘이 미친 듯 웃으며 맥주 컵을 한 200개는 주운 것 같다. 에디 일행과 난 컵을 코인삼아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해가 뜰 때까지 맥주를 퍼마셨다. 2014년까진 가끔 메일을 주고받았는데 지금 그 알뜰한 녀석은 잘 지낼라는지 모르겠네.
늘 맥주를 마셔서 이런 추억이 생긴 건지 맥주가 그런 약효?가 있는진 잘 모르겠다. 맥주란 술이 도수가 약하다 보니 운전이나 외줄타기 같은 것 말고는 마시면서 뭔가를 하거나 즐길 수 있기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맥주와 얽힌 즐거운 추억이 많다 보니, 맥주만 마시면 마음이 그때 즐거운 경험의 상태로 자동으로 워프 되나 보다. 이상하게 소주를 마시면 좀 뭔가 고단한 일을 겪은 기분도 들고 회식 때도 생각나고 그러더라고.
요즘엔 네 캔 만원 맥주도 있고 맥주 맛보기 참 좋은 시절이다. 내일 좀 급한 마감과 원고 기획 일이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금요일인 만큼 오늘 밤 역시 맥주 몇 잔 더 마시며 즐기다 잠에 들어야겠다. 원래 옛 성현의 말씀 중 이런 게 있었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