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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Apr 04. 2021

나의 펜 덕질 스토리

글씨 쓰기 싫어하는 사람의 펜 소장 컬렉션

오늘 6년 가까이 써온 아이패드 미니2가 퇴역한 기념(?)으로 백팩을 정리하면서, 내가 그동안 사서 쓰던 펜들을 하나 둘 정리하게 되었다. 그렇게 비싸고 좋은 것들은 아니지만 하나씩 닦아주다 보니 그 펜을 샀을 때 기분들이 떠올라 정리해 보려 한다. 

아래 받침으로 깔아놓은 책은 핑크플로이드의 전기 'Wish You Were Here'. 저거 언제 다 읽지...

2013년이었던가, 콘텐츠 작가팀 생활을 잠시 접고 디지털 홍보 기획팀 파트장을 맡아 회사를 옮기면서 샀던 녀석이다. 당시 화이트 모델과 블랙 모델이 각각 1만 개씩 한정판으로 나왔다고 기억하는데, 정말 불꽃 클릭해 간신히 손에 넣은 녀석. 부들부들한 보통 볼펜이지만, 당시 사장님 포함 전 직원 30명이 스타일리시한 커리어워먼이었던 회사였던 만큼 뭐라도 센스있어 보이려고 샀던 것 같다. 기능이야 뭐 모나미 153 볼펜과 다를게 없지만 좀 더 묵직한 느낌에 부드러운 필기감을 내어준다. 

뭔가 나를 감추고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받침으로 깐 건 아니고, 그냥 웃겨보고 싶었음. 궁금하면 책 내용도 공개할게요

이녀석은 캐주얼한 만년필 브랜드 LAMY의 가장 무난한 만년필 모델이다. 나의 세례명이자 외부 필명인 Francis를 새겨서 주문했다. 아마 2020년 1월이었던 것 같은데, 당시 프리랜서 생활이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뭔가 기분전환을 위해 명절 즈음 하남 스타필드 매장을 찾아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하나 마련했다. 이후 코로나 19 사태가 심각해져 있던 일도 죄다 없어졌다는건 함정. 

군대가서 읽다 헌병대 끌려갈 뻔 한 체게바라 평전을 배경으로...

독일의 필기 및 그림 도구 생산 브랜드인 Faber Castell에서 생산한 단풍나무 트위스트 샤프. 올해 말, 철학 책도 읽고 영어 공부도 하며 먀냥 놀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지는 의미에서 주문했다. 주로 영어공부 할 때 끄적거리거나 책에 밑줄을 긋는데 쓰는 편인데, 짧뚱하지만 손에 착 붙는 필기감이 손의 피로를 덜어준다. 아직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런가? 심 한 줄 쓰기가 힘드네. 

뭐 말이 필요한가. Apple Pencil 2. 아래 iPad Air 4에 보이는 책은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eBook

오늘 도착한 Apple iPAd Air 4와 함께 주문한 Apple Pencil2다. 이전 iPad mini Retina 2는 애플 펜슬을 지원하지 않아 살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6년만에 새로 아이패드를 들였으니 한 번 사봐야지 싶더라. iPad Air 4 옆면에 자석으로 붙여야만 충전을 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그 말인 즉슨, 아이패드 없으면 충전도 못한다는 뜻이렸다. 뭐 근데 Apple Pencil 자체가 iPad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제품이니… 일단, 겁나게 예뻐서 마음에 듬.


이렇게 네 개를 함께 붙여놓으니 각각 다른 개성의 디자인인데도 예쁘고 좋구나… 찬찬히 보며 흐뭇해다하 문득 중요한 생각이 머리 한 켠을 흔들었다. 


아, 나 글씨 쓰는거 싫어하지…


어렸을 때부터 글씨가 예쁘지 않았던 내게 어머니는 계속 글씨를 잘 쓰기를 요구했었다. 심지어 담임 선생님과 합세해 자꾸 나를 ‘경필대회’ 같은 데에 내보냈었고, 나는 손이 아플 정도로 글자를 써댔지만 내 글씨는 조금도 예뻐지지 않았다. 서예 학원이나 펜글씨 학원 같은 곳은 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집안 사정인 만큼, 내 글씨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채 성인이 되었다. 


시간은 흘러 때는 바야흐로 2006년 당시 가톨릭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던 시절, 신부님은 교사들이 성서적 지식을 쌓고 종교적 대화를 나누도록 하고 싶은 바람으로 모든 주일학교 교사가 ‘청년 성서공부’ 모임에 참여하도록 장려하셨다. ‘청년 성서공부’는 조를 이룬 청년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매주 일정한 성서 부분을 읽고 서로 느낌을 나누는 노트를 써서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을 나누는 독서모임 같은 것이었다. 

일정 분량의 성서를 읽고 노트를 쓴 다음 매주 만나 그에 대한 느낌을 나눈다. 이후 담당 수녀님이 노트 내용과 출결을 체크한 후 OK하면  이를 바탕으로 ‘피정’이라 하는 기도회를 마지막으로 한 기수가 마무리 되는 구조였다. 


가장 첫 코스인 창세기반을 신청해 창세기를 모두 읽고 토론한 나는 수녀님한테  매주 정말 열심히 쓴 노트를 제출하고 피정을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하루동안 내 노트를 검토해 보신 수녀님은 나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비에르 형제님은 피정을 허락할 수 없어요. 
노트가 너무 성의 없어. 글씨가 이게 뭐야. 


내 딴엔 정말 열심히 썼다며 회사 회의록과 예전 수업 노트 필기 등을 수녀님께 보여드리고 설득해 봤지만 수녀님은 계속 ‘이건 성의가 없는 것’이라며 퇴짜를 놓으셨다. 화가 치민 나는 성당 소각장에 노트를 던져버리고 다시는 성서모임을 거들떠보지도 않게 됐다. 


이후 나는 극단적으로 글씨를 안쓰는 생활을 유지해 왔다. 크리스마스 카드도 손으로 쓰지 않고 딱 그만큼의 영역을 컴퓨터로 디자인해 프린트해 붙여 사람들에게 주었고 어지간한 포스트잇 작업도 폼텍을 활용했다. 모든 메모와 필기는 MacBook Pro와 iPad,iPhone을 써먹었고 어지간한건 iPhone으로 사진을 찍거나 메모 앱을 활용했다. 


넷이 모이니 차암 보기 좋구나... 바닥 깔개용 책은 곽재식 작가의 '한국 괴물 백과'

뭐 지금도 잡지 교정을 보거나 어디 사인을 할 일 없으면 어지간하면 펜 글씨를 쓰진 않는다. 뭐 예전에 어머니와 학교에서 받은 글씨 스트레스와 성서모임 수녀님에 대한 울분이 아직까지 남아있는건 아니지만, 이제 내가 봐도 내 글씨가 별로고 글줄을 쓰다 보면 글자도 생각대로 안써지고 마구 흘리는 느낌도 들고. 심지어 가끔 내가 쓴 내 글씨를 못읽을 때도 있다. 그래도 일단, 저 펜들을 잡고 글씨를 쓰고 있자면 뭔가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다. 펜이 예뻐서 그냥 기분이 좋은건가? 그냥, 이런 말을 한 번 오랜만에 해보고 싶었다. 


우하하하! 저 iPad Air랑 애플펜슬 샀어요!!



p.s #1) 역시 노는게 제일 좋고 돈 쓰는게 제일 재미있어

p.s #2) 이 달의 나와 다음 달의 내가 힘을 합치면, 뭘 못지르겠나!


네가 언제는 돈이 있어서 질렀더냐... 이 달의 나와 다음 달의 내가 힘을 합치면 무엇이든 지를 수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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