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시까지 일하고 현찰 11만원에 몇 백만원도 넘는 좋은 경험 얻음
친한 후배의 추천으로 이번 4월 7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선거 사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번 선거에 대한 의의와 내가 바라는 결과에 대한 기대야 내 주위에서는 귀에 피가 나도록 들었을 테니 그만 하기로 한다. 기분도 안좋고. 오늘은 새벽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무려 15시간을 보궐선거의 현장에 있으면서 느낀 산발적인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표 잘못 찍었다고 바꿔달라는 사람이 꽤 많음 주의
총 14시간, 투표 과정을 지켜봤는데 생각보다 ‘잘못 찍었다’며 투표지를 바꿔달라는 사람이 꽤 많다. ‘아니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5번인 줄 알았는데, 2번이라며?’라 말하며 바꿔달라고 하는 어르신들을 다섯 명이나 봤다.
아니, 오씨라고 번호가 5번인가… 왜 또 다섯명이래? 투표의 원칙은 이전부터 한결같았다. ‘낙장불입’. 찍으면 끝이다. 일단 기표한 표는 어찌됐던 투표함에 집어넣어야 한다. ‘똥글뱅이 모양이 예쁘게 나오지 않았다’며 바꿔달라 하는 사람들도 꽤 되는데, 그것도 짤 없다. 그리고 반만 찍혔어도 자동 개표와 수개표를 통해 카운트된다고 한다.
말귀 못알아먹는 사람들 투성이
첫 단계에서 ‘신분증 검사 한 번 더한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두 번째 단계에 오면서 신분증을 지갑에 꽁꽁 싸매고 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신분증 좀 보여달라면 ‘왜 또 보냐, 의심하냐’며 역정을 내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있다.
신분증 얼굴 확인이 끝나면 다시 한 번 신분증의 내용을 체크한 후 ‘내가 확실하다’는 증거로 선거 인명부에 서명을 하게 된다. 이때 서명은 한글자 한글자 정자로 쓴 이름이나 도장. 지장만 되고 사인은 불가능한데, 미리 설명을 해도 그렇게 사인을 하겠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분은 ‘선생님 이름 정자로 쓰세요’ 했더니 서명 란에 ‘정자로’라는 글자를 또박 또박 크게 적어넣더라. 거참…. ‘아뇨 선생님 찍찍 긋고 정자로요’ 하니까. 바를 正자를 쓰는 분도 계시더란…
음, 초면에 반말할 관상이구만!
오늘 투표장에 가니 공무원들이 먼저 와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기 공무원이라고 온몸에 타투하고 댕기나봐.
티를 내거나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저 사람은 공무원’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을 수 있거든. 아, 부정적인 것은 아니고...
유권자들도 마찬가지. 내앞으로 올 때부터 이미 반말의 느낌을 팍팍 풍기는데, 그런 분들은 절대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다. 터벅터벅 걸어온 후 ‘마스크 잠깐 내려주시고 서명해 주세요’ 하면 어김없이 ‘마스크? 이거면 되나? 서명은 그냥 사인하나?’ 반말을 히드라처럼 쏴대기 시작. 희한하게 이런 분들은 죄다 남자더라.
코로나 확찐자, 외모 편차 엄청나게 큼
오늘 내가 일한 투표장에는 총 1000명 정도의 유권자 중 600명 남짓이 다녀갔다. 난 그 사람들 중 거의 대부분의 신분증과 얼굴을 대조하는 작업을 했다. 남녀소를 막론하고, 대부분 사람들이 신분증에 비해 살이 쪄 있더라. (노인들은 제각각이라 제외)
외모 편차에 대해서는 남자와 여자가 다른 경향을 보인다. 여자분들은 대부분 신분증의 사진이 실물에 비해 뻥 보태 36.5배는 더 아름답고 멋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남자의 경우는 신분증에 비해 실물이 훨씬 멋진 경우가 제법 많았달까. 뭐 특별한 연구를 한 건 아니지만 이건 남자와 여자의 일반적인 신분증 사진 촬영 패턴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여자분들은 증명사진이나 신분증 사진을 찍을 때 최선을 다해 옷을 고르고 메이크업 해 촬영한다. 게다가 업체의 뽀샵까지 가세하면 실물과의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질 수 밖에. 물론 남자도 그런 사진 신경쓰고 찍는 분들도 많지만 그 비율은 확연히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특히 40대 초반 정도로 갈 수록 그 외모의 편차는 점점 더 심해지는데, 30대 초반 컨디션 극상 재력 극상일 때 찍은 신분증 사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탓도 있을 듯.
투표 부정, 그게 가능한가?
일단, 오늘 겪어본 바로는 최소한 유권자가 들어가서 투표 용지를 받아 원하는 후보에게 날인하고 투표함에 집어넣은 후 나오는 과정에서 부정은 99% 불가능하다. 유권자는 최소 4회의 검증 과정을 거친다. 일단, 집에 공보가 날아오기 전에도 유권자를 선별하고 분류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통보한 후 유권자가 자신이 배정된 투표장으로 들어오면 일단 신분증을 검사하고 자신의 선거구가 맞는지를 체크한다. 그렇게 통과되면 자신의 선거 인명부에 맞는 ‘등재번호’를 확인한 후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등재번호를 기반으로 신분증과 대조해 그 사람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동시에 유권자가 장난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서약하는 서명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신분증 체크를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내가 맡은 업무였다. 등재번호가 적힌 표를 가지고 오면 내 옆 사무관은 선거 인명부에서 등재번호를 찾아 신분증과 유권자가 일치하는지 비교한다. 나는 유권자의 얼굴과 신분증의 사진이 일치하는지를 관찰한 후 OK사인을 내면 비로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받은 등재번호가 맞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일련번호를 잘라낸 투표용지를 건넨다. 유권자는 이 표에서 원하는 후보에게 기표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표는 네 번째 과정에서 투표 사무원의 관찰 하에 투표함에 넣고 투표장을 빠져나가게 된다. 이 과정은 각 당에서 한 명씩 나온 투표 참관인이 모든 과정을 관찰하며 체크하기 때문에 끼어드는건 불가능하다.
저녁 8시, 투표가 끝나면 각 투표장의 투표 관리 위원장은 투표 참관인이 모두 보는 가운데 투표함을 봉인하는데, 이때 투표 참관인은 다양한 각도에서 투표 봉인 과정을 촬영한다.
네 과정이 모두 끝나는 동안 투표장 밖에서는 두 세명의 무장 경찰관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밀봉이 끝난 투표함은 미리 선관위에서 준비한 차량에 실어 경찰 호위 하에 개표장으로 이동한다.
에필로그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씻고 투표장에 가서 5시부터 일을 배운 후로 제대로 쉬지도 못하며 저녁 8시까지 일했다. 선관위와 투표 관련 직원들이 일정 수만큼 상주하는 가운데 식사를 해결하다 보니 점심 한 끼 말고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예전에는 투표장에 핑거푸드를 좀 가져다놓고 조금씩 요기하며 일을 했다는데 요즘같은 코로나 19 상황에서는 언감생심. 투표장 내에서는 물 한모금도 못마신다.
배고프고 춥고 졸렸지만 투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리고 우리의 한표를 위해 어떤 시스템이 돌아가는지를 몸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두 번은 못할 듯. 보내는 시간과 받는 보수에 비하면, 솔직히 업무가 너무 지겹달까. 그래서 선거 업무 지원 나온구청 직원에게 부탁해 난 좋은 '선거 사무원 체험 굿즈'(?)도 몇 개 건졌다 끼얏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