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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Apr 17. 2021

나는 어떻게 기업 콘텐츠 작가로 업에 발을 디뎠나 #1

공대 트라우마를극복했지만난관은 여전하더라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있는 주제에 나는 공과, 그것도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 나름  괜찮은 대학 학부를 졸업했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이는 ( 알량한 학벌을 인정받는) 괜찮은 포인트기도 했다. 그리고 요즘 같은 시절에 그게 뭐가 문제냐 하는 분들도 많겠지. 하지만 기자 선배가  스토리를 물어보거나 관련 업계 면접을   ‘글을 쓰는데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냐질문받을 때면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고,  돌파구로 내가 택한 것은 ‘자조’(自嘲) ‘자기 비하 스토리였다.


고등학교 문과/이과 고를 때 ‘남자는 공대 가야지’라는 말에
반기를 들지 못하고 공과를 골랐습니다.
대입 특차를 지원할 때 몰래 신방과를 준비했지만
원서를 아버님께 들켜 찢긴 후로 홧김에 제일 이름이 긴
‘전자전기컴퓨터제어공학부’를 지원했습니다.


나름 괜찮은 돌파구라 생각했다. 70년대 후반 세대에 생겼을 법한 강압적 부모라는 발단과  몰래 원서를 준비하는 전개, 부모의 듯에 원치 않는 입학 원서를 찢겼을 때의 위기, 홧김에 이름이 제일 긴 과를 지원한 절정에 담긴 유머… 원래 뻥을 칠 때는 80% 정도는 진실이고 20%만 거짓이어야 실감이 난다고 했던가. 이 서사에서 원서를 찢긴 것만 빼면 모두 실제 있던 일이다. (정색하고 반대하시는 부모님의 기세에 내가 스스로 찢었다.)

어느 분이 인터넷에 공유하고 계신 맥마당 pdf.  지금은 구할 길이 없으니 이거라도...

이명박과 함께 대한민국의  다른 ‘리만브라더스 불리는  기획재정부 장관 강만수에서 시작된 환율 파동으로 수석기자 자리까지 올라섰던 ‘맥마당 파산하게 되고, 그전에 이미 손을 써서 맥마당 법인의 직원을 4 미만으로 줄여놓은 야비한 사장 덕에, 나와 당시 편집장은 그냥 퇴직금도  받고 길바닥에 나앉게 된다. 당시 화딱지가 나서 들고 나온  7년 그까이 된 MacBook Black이 퇴직금이라면 퇴직금?


커리어를 잃기 싫었던 나와 몇몇 맥마당 퇴직 멤버들은 당시 차츰 이슈가 되고 있던 애플 컴퓨터와 디바이스, 애플에 대한 다양한 소식을 다루는 블로그 ‘MacMagazine’을 운영하는 등 또 다른 애플 관련 잡지를 창간하기 위한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 만큼 거기에만 목을 맬 수 없던 상황. 여기저기 막 찔러보다 보니 몇 개의 잡지사의 면접을 보게 되었고, 미리 준비한 자조와 자기 비하가 담긴 스토리 때문이었을까? 거의 대부분에 합격하게 된다. 당시 내가 골랐던 곳은 전자기술을 전문으로 이야기하는 신문의 새로운 온라인 미디어 창간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갑시다!’라며 힘차게 악수했던 데스크의 웃음만큼, 미래는 희망차 보였다.


하지만, 웬걸… 알고 보니 그곳은 전자기술을 전문으로 이야기하는 신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입지를 잃고 ‘태스크포스 팀’ 형식으로 만든 온라인 미디어 같은 분위기였다. 구성원 중 온라인 문화에 익숙한 직원은 나와 다른 기자 두 명뿐이었고… 다들 신문 기자의 안 좋은 면을 아주 골고루 갖춘 나이 많은 꼰대들의 집합소였다. 그들의 하루 일과는 이랬다.

매일 선배들의 이 짓에 박자를 맞추다보니, 몸도 마음도 환장하겠더라

 입사한 지 거의 2주가 넘어가는 상황에서 매번 일과는 이렇게 돌아갔고,  이렇게 매일 술독에 빠지면서도 출근은 매일 8시가 넘어가는 상황에서 ‘내가 이러려고 여기 들어왔나’ 싶은 생각이 매일 나를 괴롭혔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던 와중 반가운 메시지가 하나 날아왔다.


이정민 씨에게 면접을 제안합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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