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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Apr 15. 2021

제주 자전거 투어 #4: 일주 끝나고 남는거? 없음

힘들 때 기억나는 풍경과 경험이 또 다시 짐을 싸게 한다

가성비 짱짱 흑돼지 라면

조금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찬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은 일요일이자 여행의 막날이기도 해 거리를 짧게 잡아 여유롭게 움직여도 되는 날이다. 어제 일부러 남긴 990원짜리 사골 곰탕 100ml에 맥주컵 두 컵 분량의 물을 부어 끓인 후, 어제 삶아먹고 남은 고기와 라면을 넣어 흑돼지 라면을 끓여 먹었다. 아.. 어제의 셀프메이드 흑돼지 수육이 두 끼나 풍부하게 해주는구나. 

김녕 성당 입구. 뭔가 여행지 수러운 예수님상

든든하게 배를 채운 후 김녕 읍내로 나갔지만 문을 연 카페 같은건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하나도 없다. 커피 하나 사가지고 성당 마당 벤치에서 미사 시간을 기다리자. 성당으로 들어가니 마치 리오데자네이루처럼 예수님상이 반겨준다. 바람이 쌩쌩 불어 좀 춥지만 서울로 돌아가 할 일과 여행 동안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10시 30분 주일 교중미사 시간이다. 

자그마한 김녕 성당의 내부. 시골 성당 답게 아담하다

김녕 성당은 작은 시골 성당이라 한 200석도 안되어 보이는 좌석인데도 그나마 코로나 방역으로 자리를 한껏 벌려놓아 공간이 엄청 널럴하다. 그래도 전형적인 시골 성당 분위기에 약했던 믿음이 좀 회복되는 기운도…

성가대가 없는건지 코로나때문에 활동을 못하는건지, 입당성가로 녹음된 성가대의 노래를 2절까지 트는 것으로 미사는 시작됐다. 서울과는 달리 게송도 따라하고 기도문도 외우다 보니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작은 성당이다 보니 신자들은 모두 아는 것 같더만. 그래도 여행지라 그런지 여행자를 그렇게 신기해 하진 않는 것 같았다. 미사를 마친 후 ‘즐거운 여행 하세요’ 하며 건네는 신부님의 펀치 인사도 유쾌하다.

함덕에서 삼양검은모래해변으로 넘어가는 길의 장관

미사를 마치고 다시 출발... 바람은 불어도 이제 끝을 향해 달리니 가뿐하다. 열심히 달려 제주에서 내 마음의 안식처 함덕 서우봉 해변에 도착. 함덕은 항상 내 제주 여행의 ‘믿는 구석’이다. 여기만 오면 고향 온 것 처럼 마음이 편해지고 쌓인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다. 코로나 때문에 작년에는 열리지 않았지만 매년 ‘스테핑스톤 페스티벌’ 할 때마다 함께 한 추억이 있어서 그럴까… 단골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께 짐을 맡기고 종착지인 제주 공항으로 내달린다. 

사라봉 공원에서 내려가는 길에 만나는 제주항의 풍광

이번에는 시내가 아닌 사라봉 오름을 넘어보았다. 공원으로 구성되어 그런지 자전거 도로가 제법 잘 정비되어 있어 다니기 나쁘지 않더라. 이미 점심 시간을 넘어 제주대 학생들과 다양한 제주시민들이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막판 사라봉 오름의 깔딱고개를 오르면 금세 제주항을 품은 너른 바다의 전경이 땀과 근육통을 식혀준다. 이제부터 구제주를 지나니 어느새 제주 공항을 지나쳐 종착지인 자전거 대여점에 도착. 

함덕을 그렇게 오가면서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먹자씨 연탄구이'

자전거를 반납한 후 버스를 잡아타고 아까 짐을 맡긴 함덕으로 컴백했다. 점심을 굶어 너무 배가 고프다 보니 숙소를 들르기도 전에‘먹자씨 연탄구이’로 직행. 여긴 함덕에서도 알아주는 맛집이지만 함덕을 열 번도 넘게 왔는데도 이곳은 한번도 들른 적이 없다. 근 단위로 고기를 파는 곳인데 혼자라 그런지 별 말 하지 않아도 알아서 300g만 파시는 센스. 

혼자 천천히 페이스 조정해 나가면서 마신(?) 고기님

이런 바베큐 스타일은 여럿이 왁자하게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좋은 고기를 자기 페이스에 맞게 천천히 구워가며 먹으면 고기 한 점 한점의 맛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빈속에 먹어서 그런가 고기도 꿀맛이고 쏘맥도 꿀맛이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점심이라 생각하니 고기 한 점 한 점이 소중하다. 쌈채소에 절임 반찬까지 아주 싹싹 먹고 숙소에서 꿀잠 시전. 

이렇게 젊고 활력있는 술자리는 언제나 즐겁다

한 잠 자고 일어나니 게스트하우스 스태프가 한 잔 하자며 부른다. 고마운 녀석들. 노인네를 그런 영한 술자리에 끼워주다니… 이런 여행 장소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특히 어린 친구들과 하는 한잔은 늘 설레인다. 그냥 별 말 없이 그들이 나누는 대화만 가만히 듣고 있어도 젊은 친구들의 생각과 관심사를 엿볼 수 있잖아. 


‘라떼’ 코드가 유행한 덕에, 그친구들이 뭔가 의견을 묻거나 나한테 말을 걸었을 때 좀 꼰대같은 말이 떠올라도 ‘라떼는 말이야~’라고 일단 지르고 시작하면 부담없이 대화를 풀어나갈 수 있다. 그친구들과 하하호호 콸콸콸 즐겁게 웃고 떠들다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교환하는 것으로 이번 제주 환상자전거길 일주는 끝이 났다. 

비오는 함덕 읍내. 떠나는 날엔 꼭 비가 오더라

떠나는 5일째 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이상하게 제주도에서 함덕을 들러 떠날 때마다 비가 왔는데 오늘도 그러네. 비오는 제주도 생각보다 아름답다고 이야기하자니 비행기가 7시간이나 연착되어서 고생한걸 생각하면 그런 말이 선뜻 입에서 떨어지지를 않네그려. 그래도 시간이 엄청 남은 김에 여행에 대한 여러 가지 공상을 해본 건 나름의 소득이다. 

안녕, 안녕 제주. 뭐 또 볼테니깐

이런 여행이 그렇지만, 예전에 올렸던 '미시령 옛길, 걸어서 넘어본 적 있나요?’일주를 마치면 뭔가 막 이뤄낸 것 같고 벅찬 기운이 막 밀려오거나 하지는 않는다.  제주환상자전거길 일주를 마쳐도, 일상은 바뀌지 않는다. 다만, 그냥 일상에 지치고 힘든 날이면 어김없이 일주 할 때  아침마다 찾아오던 기분좋은 피곤함, 달리다 숨이 차 멈춰섰을 때 보던 멋진 풍경이 떠오른다. 그 때만 생각하면 뭔가 없던 힘도 솟아나고 ‘얼른 힘든 일 마치고 다시 떠나야지’ 다짐하며 다시 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 

요 며칠동안 매일같이 달리던 제주도 해변의 사진들을 지도 위에서 살펴보며,  힘들지만 즐거웠던 여행을 곱게 갈무리해 가슴 속에 넣어본다. 음... 이 표현 간지럽네 좀. 


덧) 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궁금한 점 있음 언제든 문의 주세요~



제주환상자전거길 일주 4일차 요약

-이전글: 제주 자전거 투어 #3: 셀프메이드 돔베고기 수육

-코스: 김녕해수욕장-조천항-함덕서우봉해변-삼양검은모래해변-벌낭포구-사라봉공원-제주항-제주공항

-거리: 약 39km

-관광지: 함덕서우봉해변, 사라봉공원

-마신 술: 흑돼지 연탄구이와 함께 한 한라산, 테라, 다수의 맥주와 소주

-기억나는거: 흑돼지 연탄구이와 사시사철 아름다운 함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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