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라는 그래픽 인터페이스
텍스트는 다른 표현에 비해 굉장히 통제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직접 대면하거나 영상으로 소통하는 것에 비해 텍스트의 소통은 표정과 제스처, 음성에서 느껴지는 뉘앙스가 모두 배제되어 있다. 음성 통화에 비해서도 목소리로 전해지는 자고저장단과 인토네이션, 꿀성대로 표현되는 목소리의 장점이 사라지니 텍스트의 소통은 대련으로 치면 한 팔을 묶고 싸우는, 다소 무미건조한 소통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신기하기도 하지… 자소와 단어의 리듬을 고민하고 단어의 라임과 길이에 따른 호흡을 맞추는 것뿐만 아니라, 글쓴이가 자신이 겪었던 일을 떠올리거나 상상해 오던 것을 머리에 떠올리며 글을 쓰다 보면 똑같은 주제일지라도 모두 다른 글이 태어난다.
신기하지. 똑같은 글감과 똑같은 컴퓨터에 똑같은 언어로 글을 쓰는데 나오는 글은 전부 다르다. 심지어 한 사람의 글을 계속 보다 보면 고작 텍스트일 뿐인데도 그 사람의 성격과 말투, 표정과 행동까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자주 접하는 작가들과 기자들의 각기 다른 개성과 매력이 넘치는 글을 읽어봐도 다큐멘터리나 기록 필름, 영화 한 편을 보는 것과 못지않은 감성을 온몸으로 받을 때도 있다. 심지어 잘 쓴 음식 리뷰를 읽다 보면 그 음식의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초고속 인터넷이 도입되기 전에도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이 존재했다. 그러나 당시는 그래픽카드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고 컴퓨터의 프로세싱 파워 역시 그만큼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롤플레잉 게임의 인터페이스는 사진도, 동영상도 아닌 ‘Only Text’였다. 이런 게임을 ‘Multi User Dungeon’, 줄여서 MUD 게임이라고 불렀다. 이 게임의 인터페이스 화면을 같이 보자.
이 화면은 한국 최초의 온라인 MUD 게임 <주라기 공원>의 인터페이스 화면이다. 갈 수 있는 곳은 북, 남, 서, ‘제’ 하면 달려오는 공룡에게 제트건을 쏘라는 말이다. 플레이어가 ‘드로마에오사우러스’에게 자꾸 제트건을 쏘지만, 장난치듯 때린 정도의 타격을 주거나 아예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플레이어는 ‘드로마에오사우러스’에게 자꾸 맞아 체력 게이지를 깎인다. 이 모든 것을 텍스트로 표현하고 있다.
플레이어가 있는 대륙의 지도 역시 텍스트로 볼 수 있을 뿐, 머릿속에서 그 지도를 떠올리며 그 안을 누벼야 하는, 지금으로 보면 황당한 게임이다. 그러나 당시 게임을 했던 소위 ‘아재’ 연령 마니아들은 단순히 추억 보정이라 치부하기에는 모자란 강렬한 기억을 토로한다. 고작 텍스트뿐인 게임에 왜들 그리 흥분하는 걸까?
그 이유는 드라마 <빅뱅 이론>의 주인공 쉘든이 잘 이야기해 주었다. 각종 클래식 게임 마니아인 쉘든은 MUD 게임에 대해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를 잠시 엿들어보자.
페니: 니들은 왜 아직도 그 텍스트만 나오는 게임을 하고 있는 거야?
레너드: 페니,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엄청 긴장되고 가슴 떨린다고.
페니: 그러니까, 그 글자들이 왜 떨리는데?
쉘든: 당연하지 MUD 게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그래픽카드를 지원하거든
페니: 그게 뭔데?
상상력
<빅뱅이론>을 잘 챙겨보지는 않았지만, 쉘든의 ‘MUD 게임론’에는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텍스트는 사람의 목소리나 억양, 잘생긴 얼굴과 목소리 등을 하나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조금만 작가가 고민해 단어를 고르고 그 장단을 고민하면 저 모든 것들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물론 훨씬 더 근사하게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 맘만 먹으면 유해진도 박보검처럼 느껴지게 할 수 있겠지.
2020년 12월 15일 ‘한달어스’의 ‘30일 자유 글쓰기’ 프로그램에 도전해 그 이후 세 번에 걸쳐 한달어스의 프로그램을 통해 120일 넘게 글을 써 올렸다. 물론 인스타그램에 간단하게 사진과 쪽글을 올려 때운 적도 있지만 당시 글이 하나도 없던 빈 페이지에서 시작해 95개나 되는 에세이와 리뷰들이 브런치에 쌓였다.
한달어스 ‘자유글쓰기’ 13기에 세 번째 도전할 때 마음가짐은, 이번 기수 내에 100개를 채울 예정이었지만 제주도 여행에서 꼼수를 부리다 보니 실패했다. 하지만 뭐 어떤가? 이번 기수를 통해 다른 많은 작가님들의 글에 담긴 표정을 읽고 서로 글을 나눌 수 있었다. 또한 이전 브런치에서 만나 친해진 몇몇 작가님들과 댓글로 신나게 수다를 떤 것도 뜻깊었고. (누군지들 아시쥬?ㅋㅋ )
그동안 모자란 내 글들을 읽어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와 리스펙트의 마음을 보낸다. 이제 13기는 끝나겠지만 앞으로도 한달어스 13기 동기들은 꾸준히 내 글을 읽어주리라 믿으며 미리 고맙다는 말 하고 싶다. (안 읽는다면 올여름 더위 먹을 줄 알아랏!@#%) 아울러 100번째 기념 글에는 소소하지만 이벤트도 붙여볼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