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연수는 평범하지 않다. 평범하지 않은 작가가 보는 '평범한' 미래란 뭘 말하는 걸까? 그것도 '미래'라니. 누군가가 평범하거나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과거나 현재에 대한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미래를 어떻게 평가할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말이다.
확실한 것은 작가 김연수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때, 평범하지 않다는 것에는 그가 유명 작가라는 것이 가장 크다. 여러 문학상도 수상했고. 글도 잘 쓸 뿐만 아니라 상당할 것 같은 팬덤도 가지고 있다. 그런 그가 9년 만에 단편집을 냈다. 그 책이 2022년 50명의 소설가가 뽑은 올해의 소설로도 뽑혔다. 제목은 《이토록 평범한 미래》인데, 역시나 평범하지 않다. 김연수 소설 말이다. 읽고 나서 느낀 점인데, 개인적으로 김연수를 모르니 오로지 쓰인 글에 대한 걸 말할 뿐이다.
우린 과거를 살아왔고 현재를 살며 미래를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알고 있고, 이게 정답인데 소설가에겐 이게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소설이니까. 이게 엄청난 매력이다. 시간이란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게 소설만이 가능하지 않던가. 그래서 그가 미래를 상상해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는데 역시나 평범한 나로서 시간이 꽤나 걸렸다. 아니, 상상이 가능하지만 작가가 말하는 미래가 뭔지를 이해하는 것 말이다.
결국 작가가 말하는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선 역시나 그가 쓴 글을 읽어봐야 한다. 이 소설집 말이다. 이 책을 읽기 전 제7회 김승옥 문학상 우수상을 수상 한 <진주의 결말>을 먼저 읽었었다. 무슨 결말? "시간여행자는 어떤 사건을 지켜보고 어떤 사건을 외면할지 결정할 수 있다. 어쨌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결말은 똑같다. 다만 어떤 징검다리를 거쳐 그 결말에 이를지는 각자가 선택할 수 있다." 이 문장을 처음 봤을 때 당연한 것처럼 최근 종영한 '재벌집 막내아들'이 생각났다. 거기서도 비슷한 문장이 나왔던 것 같다. '어쨌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어쨌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죽는, 이게 어쨌든 일어날 일은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이 결말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누군가 취사선택해서 이야기를 만들어지는, 결말이 같은 것처럼 보여도 누군가 선택하고 외면한 과정에 따라 달라질 그 결말이란 게 같은 결말일까라는 물음. 역시나 소설이 쉽지 않다. 이 단편에 그런 심오한 생각이 내재해있는 것일까?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야 하는데, 동반자살을 한 그날이 인생의 첫날이 되고, 자고 일어나면 그 전날이 되는. 이런 내용이 소설 속의 소설 '재와 먼지'의 내용이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p.29)라는. "가장 좋은 게 가장 나중에 온다고 상상하는 일이 현재를 어떻게 바꿔놓는지 깨닫게 되고, 그 끝에서 시간은 다시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한다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 사랑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동반자살을 선택하는데, 그때 살아온 인생이 펼쳐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면?
살면서 버티고 버티다 넘어지는 순간들.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다음이 있어......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p.60)." 대학 때 추리소설을 쓰는 게 꿈이었던 손유미. 자기 낳았던 아들을 잃고 인생이 크게 휘청였었기에, "어떻게 해도 이전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대부분 우리가 그렇듯이. 그런데 그때 우리에게 불어오는 '세컨드 윈드.' 말이 상징적이다. 세컨드. 누구든 무너지고 엎어지는데, 그 절망의 순간 불어오는 바람. 그것도 나에게 부는 바람 <난주의 바다 앞에서>.
언젠가 어떤 소설가가 2022년 이태원 사건도 어느 날 누군가 소설 속에서 기억될 것이란 말이 문득 떠오르게 한 건,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때문이었다. 주인공 희진이 들려준 후쿠다 준과의 기억. 누군가가 우리들에게 기억될 때,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다는. 과거의 연인과의 메일로 인해 기억하게 된 어떤 시점. "어느 시점부터인가 줄곧 나를,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나를 기억하게 된 일에 대해서. 내가 누군지 모르지만 나를 이 세상에서 기억해 준 사람." 그래서 그 기억이 나에게,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길 바라는. 분명 비극이었는데, 이를 언어로 소환했을 때 비극이 비극으로 끝맺지 않게 되는. 이게 소설가가 할 수 있는 최대치 일 것도 같다는 생각.
이와 더불어 <사랑의 단상, 2014>은 시대의 비극인 어떤 사건을 시대를 어떻게 넘어서게 만드는지 보여준 대표적 단편이다. 한번 시작한 사랑이 깨질 수도 있는 게 개인에게 한정된다면, 이를 넘어서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라고 깨닫게 된다는데, 이게 세월호 사건으로 죽은 아이들에게 부모와 친구들이 함께 보낸 사랑의 편지라면 말이다.
사랑했던 여자 정미. "새벽별처럼 짧은 시간 동안 지구에서 살다가 마치 원래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사라졌"던,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지구상에 존재했던 다른 모든 생명들에게 그랬듯 그들의 인생에도 시간의 폭풍이 불어닥쳤고, 그렇게 그들은 겹겹이 쌓인 깊은 시간의 지층 속으로 파묻힌. 그래서 그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엄마 없는 아이는 사랑도 없으니까. 말없이, 그저 말없이 바람 노래 들어보네." 이게 혜은이가 부른 <엄마 없는 아이>라는 노래 구절이라고 한다. 엄마가 있는데, 그 엄마가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면 과 연결시키면 가사 내용이 처연하다. 김연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젊었던 대학 시절 이야기. 여기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면 이란 질문을 던져도 슬프긴 매한가지일 것 같다. 부모가 육체적으로 있거나 없거나, 그렇게 성장한 소설을 읽는다는 게 그리 마음이 편하지 않다 <엄마 없는 아이들>.
작가 김연수는 천주교 신자일까? 아님, 엄청난 독서량으로 그쪽 이야기까지 커버가 되는 것일까? 다른 책에서도 자주 보게 되는 종교 이야기.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조만간 세상을 떠날 할아버지로부터 계속 듣게 되는 성녀 '바르바라.' 1850년의 바르바라. 1949년의 바르바라. 중세 시대의 바르바라. 이들에게 어떤 공통점이. “우리가 육체로 팔십 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팔십 년, 미래로 팔십 년을 더 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이백사십 년을 경험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을 거야”(p. 231).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1949년의 바르바라를 죽게 한, 자기 동생을 죽게 한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우연히. 그런데, 할아버지는 아무 행동을, 안간힘을 써서 아무 행동을 하지 않기도 한다. 보통의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할아버지도 작가 김연수처럼 평범하지 않았나 보다. 할아버지는 '미래를 기억하기 위해서'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이상하지?
이제, 이 소설집에 대한 평을 끝내야 하는데 난 완전히 이해한 것일까? 이 작가를? 아니, 이 소설집을? 평범해서 평범하지 않은 작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도 탓하지 않겠지만, 확실한 것은 저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듯이, 시간이 가고 생각이 달라지듯 자기에게 맞는 작가가 있다는 것이다. 이래도 내가 평범하다는 사실이 달라지지 않지만, 다른 작가를 만나서도 달라지지 않을 평범함이기에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실망하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