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라서 가능한, 소설이라서 좋다.

에르베 르 텔리에(2022). 아노말리. 민음사

by 길문

소설이 소설임을 보여준 소설. 소설이 소설이지. 그게 소설임을 보여줬다고? 앞에 소설과 뒤에 소설이 다른 의미일까? 이 책이 소설임에도 정말 소설같이 느껴졌다는 의미는 이 책이 소설이기에 가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뭔가 말장난 같기도 하고. 대략 소설은 작가가 작가의 상상력이나 실재 현실을 허구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 책은 처음부터 작가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끝까지 허구로 이뤄졌다. 결국, 잘 쓴 소설. 재미있는 소설이란 말과 같다. 말을 돌려서 하다니!


작가가 언제 한국에 왔었나 보다. 그때 그가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 다음과 같다. "나 자신의 분신과 대면한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생각하면서 쓴 소설”이고, “자신의 분신과 대면할 때의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기 위해 여덟 명의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여기에 “각 인물들의 특징에 맞는 문체로 텍스트 구현했다"라며, “살인 청부업자 이야기는 스릴러 법칙을 지켜가면서 썼고, 작가 이야기는 문학 분석적 장르로 만들었다.”


책이 재미있어서 장르를 따지며 읽지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스릴러 같기도 했고, SF 같기도 했다. 기타 어떤 장르가 있었더라? 소설이 소설이면 충분하고 가장 재미있는 소설 중의 소설인 것 같아서 작가의 말도 사족처럼 들린다. 책을 읽다 보면 책 속의 주인공 중 하나인 빅토르 미젤이 〈아노말리〉라는 책을 썼다고 하니, 이 책 제목이 뭐였더라 잠시 혼란스러워 봤더니, 당연히 《아노말리》다. 참, 소설의 가능성이라니. 작가의 변주가 놀랍다. 그래서 들리는 소설이 낯선데, 흥미롭다. 그래서 2020년에 공쿠르 상을 받았나? 그랬겠지?


공쿠르상 수상작 중 가장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한다. 많이 팔렸으니 대중성과 상품성은 입증이 된 거다. 내용은? 역시나. "동일한 승객들을 태운 동일한 비행기가 두 번 착륙한다니. 그 비행기 안에 사람은 3월에 착륙한 사람들과 동일. 이 비행기는 6월에 착륙했다. 그럼 두 번만 착륙할까? 책 말미에는 3번째 착륙하는 비행기는 격추하는 것으로 나온다. 2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이다니? 그럼, 4번째 비행기도 동일한 승객을 태우고 같은 비행기로 3개월 후쯤 또 착륙, 아니 격추시킬까?


참고로 공쿠르상 수상금은 10유로라고 한다. 2002년 이래로. 수지가 맞을까? 수상하면 대게 40만 부 이상 팔린다고 하니, 인세로 수입이 보장된다는 의미이다. 돈보다 수상이 더 명예롭겠지만 말이다.


책 속엔, 같은 비행기에 같은 승객이 도착하는 이런 일은 미국만 일어난 게 아니라 중국에서도 일어난 것으로 나온다. 중국 얘기는 비중이 크지 않다. 더 이상 여기에 초점을 맞추면 작가의 의도를 벗어날 것 같다. 아니, 작가도 감당이 안 될 것 같다. Ctrl + C과 Ctrl + V이 반복된다니. "같은 시대와 공간에서 타인은 불 수 없지만 본인 스스로 자신과 똑같은 대상(환영)을 보는 것"을 말하는 도플갱어와는 다른 것 같다. 도플갱어는 자기만 보는 것 아닌가? 그런데, 여기는 정말 똑같은 인격체가 두 배로 나온다. 같은 인물인 것이다. 유일한 차이란 3월에서 6월 사이 벌어진 일에 대해 6월에 도착한 사람들은 그 사이 벌어진 일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타난 미묘한 감정들 변화란.


그럼, 3번째 착륙하는 사람도 같은 인물이라는 건데, 궁금하다. 같은 인간이 3명이나 출현하면. 아무리 천재적인 작가라 하더라도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용을 어떻게 전개할까? 같은 인물들 사이에서 보이는 미묘한 차이들, 그 내용들도 흥미롭다. 3월에 착륙한 빅토르 미젤은 그의 책 '아노말리'를 탈고하고 발코니에서 투신해서 죽는다. 그런 그가 6월에는 어떤 모습을? 그 둘 중에 블레이크란 살인청부업자는 자기 자신을 살해하기도 한다. 모범적인 가장이란 탈을 쓴 살인청부업자의 이중생활을 넘어서, 자기가 자기를 죽이다니. 그것도 프로답게.


작가가 말했기 때문에 나중에 그랬구나 하고 알게 된 것이지만, 주인공에 따라서 작가의 서술과 전개가 다르다. 독자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을 텐데, 이는 작가가 속한 실험적 문학 창작집단인 '울리포' 회원이라는 점에서 명민한 독자들은 일견 예견했었을 것도 같다. 회원 중에 조르주 페렉 정도만 알았는데, 그 못지않게 이 작가도 소설가로서 독특한 입지를 구축한 것 같다. 그럼, 독자는 실험대상?


소설은 총 3부로 나눠있었는데, 이게 그럴 수밖에 없구나 하고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1부였다면, 2부는 6월 비행기가 착륙한 후 보여주는 미 정부의 대응과 수습 과정이 담겨있다. 여기서 이 사건을 대처하는데 각 종교지도자들을 초청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하다니. 배가 산으로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작가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깊이를 가늠하게 한다.


3부에서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면하는지 누군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누군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하고. 아마, 작가가 가장 공을 들린 부분이 이 부분 아닐까 생각해 본다. 더 이상 진행되지도 않지만 여기까지여야 한다. 소설 읽기는 말이다. 소설이니까.


소설 제목이 아노말리(anomaly)라. 제목에서 이미 냄새가 나긴 났다. 그 냄새가 뭔지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말이다. 제목은 어떤 철학적 상징처럼 느껴졌지만, 읽는 동안 호흡은 그런 느낌을 전혀 주지 않았다. 이게 그의 소설이 대중성과 실험성 모두 받아들여진, 조화롭게 꿰맞춘 듯한 느낌은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이었다.


이게, 소설이 소설임을 보여준 소설이라고 첫 문장을 시작한 그 답이 되었으면 한다. 제약을 넘어 새롭게 경계를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게 소설인 것 같다는 말이다. 자기가 만든 경계도 가뿐히 넘는, 그래서 소설이란 장르는 무궁무진할 것 같다. 작가의 상상과 공상과 망상 그 어딘가에서 작가가 머무는가에 따라 말이다. 거기에 뛰어난 서술로 말이다.


그런데, 프로토콜 42가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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