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니, 1년씩만 더 살아보기

한 달 살기, 영화 코코, 그리고 1년만 더.

by 길문

한 달 살기


한 달 살기가 맞을까? 한 달 살이가 맞을까? 한 달 살기는 한 달만 살아야 하는 걸까? 이게, 한 달 여행과는 차이가 많겠지? 여행이라고 하니 어딘가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차이일 것이다. 한 지역에 한 달 동안 여행하기도 한 달 살기가 될까?


이건 유행일까? 언젠가 후배와 세계각국을 돌면서 한 달씩 살아보면 어떨까 얘기한 적이 있다. 그 경우 당연히 대도시일 텐데, 그때 그런 얘기를 했던 배경엔 이미 머릿속에 한 달 살기가 이미 보편화된 상태였을 것이다. 보편적이라?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꽤 있어 맞긴 맞는 것 같다.


회사를 은퇴하고 부부가 맞벌이 등으로 경제력을 어느 정도 갖춘 사람들이거나, 직업이 교수나 교사 등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세계 여기저기 나가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시간이 남는 청춘이거나 유튜브로 생계를 유지하려거나. 처음 언급한 사람들로는 주로 연세가 지긋하면서 국내에 한 달씩 살아보는 사람들이다. 아는 선배도 그렇고. 두 번째 경우는 남편이 대학교수나 선생이고 아내도 학교 선생인 경우로, 이런 조합도 꽤 많은 것으로 들린다. 이들은 주로 방학을 이용해서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 같다. 집에 세계전도를 놓고 가본 곳을 표시해놨다고 한다.


마지막 경우는 그 이유와 목적이 다양하겠지? 군대를 갔다 와서 미래에 뭘 할까 정하지 못한 예비 사회인이거나, 군대 의무가 없는 여성이거나. 어느 날 유튜브를 보니 이를 직접 실천하고 영상을 올리는 부부가 있던데, 지금도 그런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생계를 위한 목적이라도 자기 사적인 생활을 공개하는 게 이상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던가? 자기 생활을 파는 것. 보여준 모습이 진짜 100% 생활인지, 기획된 생활인지는 그들 스스로 알겠지만 말이다. 아님, 속는 셈이라도 재밌으면 그만 일수도 있다. 리얼이나 가짜나 사는 건 사는 거다.


중요한 건 정주개념이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국내에서 유학을 하거나, 해외로 이민을 가거나, 해외지사로 파견되거나 그렇게 일시적인 사람들은 꽤 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도 한 달 살기가 '있다'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이게 기존 삶의 방식을 완전히 대체하지 않기에, 그저 하나의 대안?


아는 선배는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로 책을 냈다. 전적으로 본인이 선택하는 경우일 테니, 살아가기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는 것 맞는 것 같다. 살아가는데 선택의 여지가 있다니! 이건 좋은 것 같다. 일부한테만 해당되겠지만.


대화를 1년 살기로 확장해보면 어떨까? 글쎄, 이건 선택지에 없을 확률이 높다. 국내에서 1년? 아님 해외에서? 이렇게 길게 서두를 질질 끈 것은 우리 삶이 단순하지 않아서 혹은 짧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초점을 '살기'에 두고 싶어서였다.


살기 싫을 때, 살기가 벅찰 때, 이제 희망의 끈을 놓고 싶을 때, 한 번 생각했으면 해서다. 누굴 위해? 한 달 더 살아보고 판단하려니 그 한 달은 너무 짧다. 더 살지 말지 판단하기 어려워서 말이다. 이건, 한 번 수명이 다하면 더 충전이 되지 않는 재생이 안 되는 우리 인생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방전된 에너지와 열정과 꿈을 다시 충전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재생이라니. 지치고 지쳐서, 머릿속에서 미래와 희망의 끈을 놓으라고 악마가 사탄이 왜 쳐 될 때 말이다. 죽고 싶은 적 없다고?



영화 코코 - 멕시코 망자의 날


영화 '코코'가 있다. 만든 영화사가 디즈니픽사던가? 이 영화도 당연히 호불호가 있거늘.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은 '망자의 날'이 멕시코의 기념일 때문이 아니고, 그날에 죽음을 삶과 동등하게 놓고 이를 기껍게 받아들인다는 점 때문이다. 죽은 가족과 친구들을 기념하는 날. 죽은 걸 기념? 그렇겠나? 같이 살아온 날들을 기념하는 거겠지. 죽음을 축제로 받아들여 같이 즐기다니.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어서 좋기는 하다. 왜 비딱하냐고? 그렇다고 죽음을 찬양하거나 죽으라고 부추길 수 없기에 비딱선을 탈뿐이다.


그들에겐 누군가 죽더라도 그 고인을 살아온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기고 남은 사람들의 기억과 정신 속에서 같이 살아간다는 이 생각. 그래서 '망자의 날' 동안 잠시 저승에서 이승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해서 축제를 벌이는 날. 고대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죽음을 결코 삶의 반대로 생각을 하지 않았다니, 죽음을 삶의 당연한 연속으로 받아들였다니. 세련됐다. 죽음에 대한 이해 말이다.


이렇게 망자의 날인 11월 1일~2일이 10월 31일과 연결되어 축제의 날로 진행된다는데, 10월 31일은 핼로윈 데이 아니던가. 이날은 그리스도교에서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인 만성절(모든 성인의 축일, All Saints Day)의 영향을 받은 모든 성인들의 날 전야(All Hallows'Eve)이다. 그러고 보니 이날도 축제다. 핼로윈 데이 이건 망자의 날이건 죽음을 기억하고 이를 축제로 승화시켰다니.


주인공 미구엘은 흥겨운 음악과 컬러풀한 색감의 세계로 이끌며 죽은 자들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승에서의 삶이 기대와 다를 때 저승으로 자유롭게 넘나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과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장치에서 모드만 바꿔서 선택할 수 있다면. 영화 같은 얘기지만, 언젠가 글로 쓸 생각만 해도 즐거울 것 같다. 살다가 재미없으면 죽어보고, 죽었는데 저승이 재미없으면 이승으로 폴짝 뛰어넘고.


그럼 강도 필요 없겠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도천이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요단강이다. 넘긴 뭘 넘어? 수고스럽게. 그냥 스위치 하나 바꾸면 되는데. 오, 예스!



1년씩만 더 살아보기


언젠가 김완(2020)이 쓴 '죽은 자의 집 청소'를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죽음에 대해 말이다. 사고사가 아니라 스스로 죽은 본인상. 그래서 읽는 내내 더 슬펐던 것 같다.


어느 날 친구가 본인상의 경우 죽은 사람이 문자를 보낸 것 같아서 섬뜩했다고 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살만큼 살고 나이가 들었다면 결국 본인상 아닐까? 누군가 연락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려야 할 테니. 그게 부조를 받으려는 얄팍함이 아니라, 세상에 고하는 것 말이다. 나의 부재. 나 없어요,라고 알리는 것. 이건 강요되지 않는 예의 같다.


이 사람, 이제 세상에 없어요 하는 이유 있는 아우성. 이유 있는 부고. 알려야 할 것 아닌가.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한테 이 사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행히 삼도천을 넘거나 요단강을 건너 슬픔과 기쁨이 없는 그곳에 갔더라도, 남아 있는 사람들에겐 알려야 하는 것 아닌가. 망자에 대한 예의뿐만 아니라, 산 자에 대한 예의를 위해서도 말이다.


요행히 죽음과 생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면, 이런 짧은 요식행위도 필요 없겠지만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스위치 하나. 덜컥, 모드를 바꿔서 선택할 수 있다면 말이다.


만성절의 영향이건, 고대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철학이건, 켈트족의 전통이건, 핼로인 데이도 그렇고 죽은 자의 날도 그렇고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우리와 많이 다른 것 확실하지 않던가. 그러니, 김완의 책을 읽고 먹먹한 순간을 맞이했겠지. 죽음이 죽음이 결코 즐겁지 않았다. 두려웠다. 그렇게 죽을까 봐 무서웠다.


친구가 그랬었다. 이 매거진에 실리는 글들이 어둡다고. 밝은 글 쓰라고.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누가 강요하지 않았다. 써야 할 것 같아서 쓰는 것은 맞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살만큼 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요즘 부쩍. 그래서 죽음 너머도 생각해보게 되고. 라떼는 말이야가 아니라 우리 나이에는 말이야가 정말 익숙해진 나이. 시간이 벌써 저만치 달려가고 있어서 말이다. 너만 알게 일기에 쓰라고? 물 흐리지 말라고?


언젠가부터 이와 같은 생각이 빈틈을 주지 않는다.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자꾸만 몰입하게 만든다. 이제 살만큼 살아서인가? 혹시나 해서 유튜브에서 '우울'이란 단어를 쳐봤다. 상당히 많은 영상이 올라와있다. 어떤 이는 대학전공과 관련이 없을 텐데, 심사숙고해서 만든 영상도 올려놨다. 상당히 많다. 우리 주변에. 모든 이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살다가 살면서 부딪치게 되는 일상인 것도 같다. 피하지 말아야지......


늘 듣던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자살률 1위. 전 세계 자살률은 10위라던데, 이때 비교 국가는 비교하기 어려운 아직 발달하지 않은 국가들이다. 굳이 OECD와의 비교를 들먹이는 것은 잘 사는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숫자가 주는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못 살지 않는데 자살률이 높으니 이게 문제인 것이다. 가난이 원인이 아니지만 상대적 박탈감도 크다는데. 결론적으로 OECD 평균 자살률의 2배. 이 기록이 17년간 1위로 유지되다니. 2019년을 기준으로 한국에서는 하루에 40명꼴로 자살을, 이를 분으로 나누면 35분에 한 명 꼴이라고 한다. 맙소사!


이들 대부분인 60~80% 정도가 우울증 등 정신질환 때문이라고 하는데, 눈으로 보이는 육체적인 질환(장애)에 대해 사회적인 인식이 변하는 것에 비하면, 아직 멀어도 이 분야는 한참 먼 것 같다. 우리 주변에 아주 흔하게 벌어지는 현상인데도 말이다. 나이와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자살에 대한 원인과 이유야 다양하더라도, 나타난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원인과 분석, 처방을 하더라도 결과가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 역시나 달라지지 않았다. 여자보다 남자가 더 높다는 정도도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


그런데, 넌 이 글을 왜 쓰는데? 인기도 별로 없을 글을. 이유는 명확하다. 지금 난 내 상태를 드러내는 중이다. 이렇게 객관화하면서 나를 살펴보는 것이다. 내가 지금 어떤지. 그래서 혹여나 비슷한 사람이 있다면, 같이 한 번 생각해보고 싶어서였다. 끊임없이 나를 부정하는 지금, 1년만 더 살아보는 게 어떨까? 지금 당장 결정하지 말고 1년 후 얼마나 달라질지 연 단위로 끊어서 살펴보자는 것이다.


1년이라고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보다, 1년간 유예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런 후 그래도 나아지지 않으면 또 1년간 유예를 해보자. 그래도 달라지지 않으면 1년을 또 1년을 유예해 보자. 그리고 이게 결정적일 텐데, 당신의 가족이, 당신의 친구가, 당신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위한 장례식에 와서 슬퍼하지 않으면 어떨 텐 가? 그저 와서 애석한 표정 한 번 짓고, 육개장에 소수 한잔 들면서 수다 떨고 의례적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억울할까? 지금까지 산 게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망자의 날에 만나서 회포라도 풀려나? 그게 사실이라도 망자의 날에 만나서 싸울 수도 없고 말이다. 그보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되어 한 번 죽어보고 선택하고 싶다. 모드만 살짝 바꿔서 말이다. 이승이 나은 지 저승이 나은 지 선택하게. 두 개 중 하나 고르는 게 얼마나 쉽겠는가?




매거진 제목 '짧은 인생에 대한 생각'은 아래 링크를 참고했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436&cid=46720&categoryId=46819


https://brunch.co.kr/@francis/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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