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인생에 대한 생각'이란 매거진 제목은 아래 링크에 나온 글을 참고했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436&cid=46720&categoryId=46819
어느 날 문자가 왔다. 본인상. 친하지 않지만 안타까웠다. 뭔 일일까?
같은 문자라도 본인상은 드물 터. 드물어야 한다. 먼저 든 생각. 먼저 갔구나. 그리고 든. 왜?
의례 그렇듯이 봉투로 처리하기로 했다. 장례식장에 가서 얼굴 보이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대강의 장례식장이란 게, 아는 친구 부모상이나 상대 쪽 상이면 웃는 얼굴에 소주잔 기울이다 오게 된다. 살만큼이란 기준이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슬퍼할 이유가 있을까?
그것도 남이고. 언젠가 돌아올 우의(友誼)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슬픔을 나누면 반이라고 하니까. 아주 친하지 않으면 슬프지도 않은 형식에 갇힌 장례.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접촉이 일상이 되다 보니, 톡으로 날아온 부고장에 딸린 번호로 평소 성의를 다하는 정도. 그래서, 더욱 슬픔을 나누기도 쉬워지기도 했다. 정말 슬픔을 느끼는지는 모르지만.
영화로 본 서구 장례식도 일면 웃으면서 고인을 보내기도 한다. 우린 영정 앞에서 예를 표시하고, 차려진 상갓집 식사를 기꺼이 먹고 오는 게 예절. 그러다 지인 만나면 사는 근황 묻거나 그간 소외되었던 관계를 재조정하느라 약간의 아는 체와 과장된 태도로 친한 척 하거늘. 그래서 장례식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갈 자를 위한 예식인 것도 같다.
아주 절친이었거나 신세를 지지 않았으면 본인상은 부담스러워 가기가 쉽지 않다. 죽은 사람 생각하면 거기 산 사람들과의 조우가 불편한 것이다. 거기에 나이가 상대적으로 젊다면 말이다.
모든 장례식이 죽은 자를 위한다고 하지만, 먼저 간 이는 이를 알 수도 없지만, 버스나 지하철처럼 정해진 순서처럼 차례가 오지 않으면 달갑지 않다. 죽음은 예측되지만 순서는 예상하기 어렵지 않던가. 태어날 때는 선형적인 것 같지만 말이다. 이걸 안다고 죽음이 위로되지 않는다.
왜가 궁금해 지인에게 물어보니 스트레스라고 한다. 스트레스? 처음 들었을 때 이 말을 철석같이 믿었었다. 궁금함을 더 하는 게 예의를 벗어나는 것 같기도 해서 여기서 멈추려고 했다. 죽었는데 말이다.
며칠 후, 아는 선배로부터 온 문자. 확인요청. 어느 언론사가 냄새를 맡았나 보다. 언론이? 누군가의 죽음이 개인적이지 않을 수 있는 순간이 돼버린 것이다. 문자는 대게의 개요에 대한 확인이었다. 그사이 회사는 사건 관련 2차 가해 신고센터를 운영한다고 공지를 했다.
어라? 죽음은 그럴 수 있는데, 죽는 과정이 다르면 처리과정이 다 달라지는 순간이 온 것이다. 스트레스로 인한 과로사와 자살. 이 두 단어 사이 거리는 갑자기 지구와 달 사이 거리가 아니었다. 저 먼 우주의 행성과의 거리. 죽음이란 단어도 달갑지 않거늘 자살이라니.
이렇게 되면 의구심과 궁금함이 뭉게뭉게 펴 오른다. 죽은 자에 대한 애달픔이 어느덧 사라지는 순간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의혹일까? 유서엔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세상을 등졌을까?
일이 벌어진 후 일련의 과정이 당사자에게 엄청난 부담감, 그렇구나.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로 인한......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 명제는 언제나 따져볼 필요가 없는. 이로 인해 왜라는 의문은 소멸 돼버리게 되니까 말이다. 그저, 희망은 영혼이 구천을 떠돌지 않기를. 여기까지다.
이런 일이 한낮에 40도 육박하는 여름날에 벌어졌다면 어땠을까? 죽음은 같지만 받아들일 사람들 마음 말이다. 여기에 살았던 사람도 쉽게 의지를 꺽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다 계절 탓. 겨울 탓이라고 하고 싶다. 아니, 겨울 탓이다. 이 겨울 우울해도 다가 올 봄 같이 맞이하고 싶다. 다들, 마음 감기 걸리지 않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