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인생에 대한 생각'이란 매거진 제목은 아래 링크에 나온 글을 참고했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436&cid=46720&categoryId=46819
우리 집 붕붕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2022년 9월 11일.
스스로 건넜겠는가? 건넜다고 하면 좀 위로가 될까? 이게 선택 사항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무지개다리를 건넜다(crossing the rainbow bridge). 서정적인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슬픔이 가시지는 않는다. 이럴 땐 시간이 약이다. 잊는 게 아니라, 잊히는 거다.
대게 다리란 육지와 육지를 연결한다. 이승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저승에선? 저승과 저승은 서로 연결할 필요가 없으니 다리가 필요하지 않겠다.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다리가 무지개다리라니. 사람들이 죽었을 때는 무지개다리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작자미상의 시가 주는 영향이 엄청나다.
다리는 대게 물이 흐르는 곳에 만든다. 그게 강이건, 작은 하천이건, 바다건 말이다. 뭔가를 연결해주는 그 다리 밑엔, 그게 죽음과 연결되는 삼도천이 흐른다. 불교와 도교에서 그렇게 부르는데, 기독교에서는 요단강이다. 이 요단강은 실재 흐르는 강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서 발원해서 갈릴래아 호수를 거쳐 사해로 흐르는 강.
요단강이건 삼도천이건 그곳에 놓인 다리를 우리 집 강아지가 건너갔다. 이건 사실이다. 다시 보지 못하니. 이래서 슬픈 거다. 다시 못 보는데, 그 사이 많은 추억이 기억으로 자리 잡아 슬픔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여섯 살이면 강아지일까? 개일까? 언젠가, 강아지는 개의 새끼가 아닌 우리가 키우는 개를 통칭하는 것처럼 불리기 시작했다. 좋은 건가?
다리를 건넌 것은 알겠는데, 다리를 건너 어디 갔을까? 사람이 죽은 뒤에 간다는 영혼의 세계인 명계(冥界)에 갔을까 아니면 천상에 있다는 이상적인 세계인 천국(天國)에 갔을까? 반려동물을 키우던 주인이 죽으면 하늘나라에 먼저 가있던 그 동물이 마중 나와준다는데, 어딘가 이승의 끝에서 기다려줄까? 저승 입구에서 기다려줄까?
언제부터 말라가던, 이걸 눈으로 구분이 쉬웠다면 진작에 대비를 했겠지만,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다. 직장 생활로 키울 수 없어 아버지 집에 맡겼는데, 그 아버지도 연로해서 살아온 날을 추억하며 사셨으니.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분이 개를 애지중지하기는 애초 어려웠다.
뭔가 이상해서 데리고 간 동물병원에선 예후가 좋지 않다고 한다. 신장이 다 망가졌다고. 사람도 신장이 좋지 않으면 힘들거늘. 그것도 개가 말이다. 살 만큼 살았다는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천수를 다했다는 수의사의 말이 위로가 되었겠는가? 자기 탓하지 말라는 의사의 말이 너 '잘못'이라는 듯 송곳이 되어 더욱 가슴을 후벼 판다.
살다 보면 찾게 되는 장례식장. 나이 든다는 증상 중에 하나가 이곳에 가는 빈도가 높아지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 많은 장례식에 가더라도 이렇게 슬폈을까? 그러고 보니 반려개가 사람보다 낫다는 세간의 말들이, 딱히 그 개가 주인한테 더 잘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개는 개의 본분을 다했을 뿐. 이 본분이 인간한테 특별한 거였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개'처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능이 높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이 개보다 낫다는 증거는?
추석연휴 문 연 병원을 돌아다니다, 몇 가지 선택지에서 선택한게 눈 맞춰주기. 마지막 갈 때까지 눈을 맞춰, 네가 가는 길 혼자가 아님을 그렇게 느껴주고 싶었지만, 그래서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최대한 눈을 맞춰줬지만, 이건 어디까지 내 마음을 위한 위로일 뿐. 죽음은 '다시'를 허락하지 않는다(no begin again).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날 남은 기력을 다해 자기가 머물던 공간을 비틀대는 몸으로 둘러보고, 서성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다 자기가 깔고 자던 방석에 누워 조용히 무지개다리를 건넌 붕붕이. 가는 순간까지 주인을 편하게 해 준 것 같은 믿음!
터진 둑처럼 흘러내리던 눈물도 마르듯이, 시간이 지나면 덤덤해지더라도, 개라도 자기 죽음을 예감했을 것 같은. 그래서 더 슬펐었다. 붕붕이는 끊임없이 쉬지 않고 아프다고 신호를 보냈을 터. 그 예감을 불행이도 개가 아니라서 맡지 못했을 것 같다. 사람인데. 둔감한 놈!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잠시라도 귀를 기울여봐야겠다. 주변의 소음에 대해 말이다. 소음이 아닐 수도 있으니. 조금 진지하게, 이 신호가 너로부터 오는 것일 수 있기에 말이다. 왜냐하면 긴 것 같은데, 결코 긴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