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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남자가 한 번도 된 적이 없는 남자

오스카 와오를 회상하며......

by 길문

그렇고 보니 그랬다. 지금까지 누군가 나를 자기의 애인이나 친구로 소개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여기 누군가에서 남자는 예외다. LGBT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 말인즉, 누군가 한 번도 그 남자의 여자가 없었다는 말과도 동일하다. 맙소사! 이건 사실이다. 어찌 보면 불쌍하기도 하다. 그 흔한 연애한번 제대로 못하다니. 연애가 뭔지 조작적 정의가 필요하지만. 오스카 와오도 그랬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오스카 와오가 생각난 것이다. 갑자기는 아니고. 동병상련?


내 처지가 소설 속 주인공 와오와 비슷하다고 느끼고는 있었다. 오스카 와오라니? 오스카 와일드도 아니고. 원래 와일드였는데 잘못 표기했다나? 오스카 와일드건 와오건 무슨 상관이람. 오스카 와일드는 아일랜드의 유명한 극작가. 실존인물이었고 와오는 소설 속 주인공. 그때 소설가란 주노 디아스를 말한다. 그가 쓴 첫 번째 장편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The Brief Wondous Life of Oscar Wao)으로 그는 2008년 퓰리처 상을 받았다.


글쎄, 이 책이 퓰리처 상을 받았고 그 주인공이 오스카 와오라고 해서 갑자기 와오와의 처지를 비교하기에는 나와 와오 사이는 멀어도 한참 멀다. 한 곳은 도미니카이고 한 곳은 역시나 한국. 거기다 난 실존인물이고. 오스카 와오는 140kg의 몸무게를 가진 남자. 난 가열찬 노력으로 몸무게가 결코 표준치를 벗어난 적이 없다. 이건 노력한 산물인데, 이걸 남이 알아주진 않는다. 이런 와오를 등장시킴으로써 슬쩍 내 처지를 묻어가려는, 내가 좀 낫다고 노린 것도 아니다.


와오의 몸무게로 인해 벌써 와오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진다. 그러니 그런 와오를 좋아하는, 그런 와오가 자기 남자친구라고 소개하는 여자가 있기가 어렵다. 여기에 와오는 대게의 남자처럼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그러다 그가 좋아한 퀸카는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고. 와오가 이를 목격하고. 그는 또 백인도 아닌 흑인이다. 못생기고 외골수처럼 산다. 책을 죽도록 읽고, 글을 쓰고 판타지와 SF에 빠져 살아간다. 이건 나랑 다르다. 그런데, 누구보다 오스카는 사랑에 목말라한다. 이건 나랑 똑같다. 소설이라서 그 사랑은 늘 좌절로 끝나지만, 반대로 오스카의 누나 롤라는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다. 그녀가 원하면 그녀는 늘 사랑을 할 수 있다. 그래야 와오의 처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소설 속 그 시대는 권력이 개인의 삶과 심지어 성까지 착취를 하던 시대다. 시대 배경은 그렇게 고된 삶이 중심인 도미니카이다. 당시보다 지금 여성의 권리가 잘 작동되는 시대라서, 여성이 스스로 성을 맘대로 파는 것처럼 묘사하면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는 시대라고 단언하긴 그렇다. 성의 상품성은 일면적이지 않기에. 당시 독재자는 자국의 예쁜 여자들은 다 건드렸다는데, 이제 이런 시대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건 정말 다행이다.


하나 덧 붙이자면, 와오와 다른 점은 와오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과 와오가 살던 시점보다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었다는 차이. 소설 속에서 이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없었어도 그리 넉넉했을까? 그때나 이때나 물질적 토대와 풍요가 덜 중요하게 여겨졌을 것 같지 않다.



인생이란 그런 거다. 아무리 열심히 내 행복을 모아봤자 아무것도 아닌 듯 쓸려가 버린다. 누군가 나한테 묻는다면, 난 세상에 저주 따윈 없다고 대답하겠다. 삶이 있을 뿐. 그걸로 충분하다고(p. 246).


위 인용구가 멋있어서 당연히 인용한 것이지만, 삶이 있는데 혹은 있었는데 그걸로 충분하다고 인식하고 받아드릴 정도라면 빨리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죽음이 선택지에 있을 수 있지만 선택이 되고 말고 상황이 아니지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가능하면, 가능하지만, 빨리 가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다. 오스카 와오도 죽었는데 말이다.


와오는 자기가 도미니카에서 유일하게 총각으로 죽을까 봐 두려워했다. 이걸 소설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독특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이건 대부분 수컷들이 성에 대해 끊임없는 몽상과 상상을 하면서 사는 것과 연장선 상에 있다고 생각된다.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기에. 애초, 우리 인간이 그렇게 진화되었으니 여기서 묻지 말자. 이성이 감정을 항상 이기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도 알기에 이런 건 사족이 될 것 같다.


그럼, 와오는 그가 걱정한 것처럼 숫총각으로 죽었을까? 이러면 소설이 아니겠지만, 작가가 묘사하는 시대의 아픔이 유머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있어 잠시 한눈팔 수 있지만 당시 시대로 그렇듯이 현재 우리 삶도 그리 녹녹하지 않다. 이건, 우리가 모두 아는 일이다. 우리 삶에서 쉽게 얻어지는 게 없다는 것을. 소설이라도 오스카 와오의 사랑과 경험도 결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소설 속에선 비극적이지만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높은 것처럼 묘사되듯이 현실 속 우리가 사는 세상도 모양과 형태만 다를 뿐 비슷한 것 같다.


어쩜 우리 수컷들은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독재자 트루히요처럼 예쁜 여자란 예쁜 여자는 모두 건드리는 상상을 해왔을는지 모른다. 그와 우리의 차이를 볼 때 그가 득표율 103% 당선된 대통령이란 것 말고는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득표율 103%라는 게 불가능하니 독재자가 아닌 보통의 와오처럼 꿈을 꾸는 거다. 다행히 꿈꾼다고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기에.


여기에 와오는 다른 꿈도 꾼다. 꿈꾼다고 탓하지 마시라. 그는 도미니카의 톨킨이 되려고 반지의 제왕이나 스타트렉 등을 수 없이 보면서 작가를 꿈꾼다. 꿈꾼다고 다 작가가 되지 않지만. 이게 현실이지만, 이건 글쓴이도 이 글을 혹시나 읽는 당신도 비슷하지 않을까. 톨킨까지는 아니라도 많은 구독자를 갖는 것과 더불어 여러 출판사에서 책 내자고 연락 오는 상상이란.


결론적으로 숫총각으로 죽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 와오도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기는 한다. 여기서 하기는 한다라고 말한 건, 와오가 불쌍해서다. 왜냐고? 와오가 죽으니까 말이다. 이게 작가가 치밀하게 계산한 결과이고 당시 시대상황 결부시키면 묘한 대비가 되어 오스카 와오의 삶을 한 번 더 생각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중요한 건 와오가 죽더라도 그는 사랑을 경험한다. 남녀 간에 오갈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을 알고 죽으니 다행이다. 대상은 옆집에 사는 나이 많은 창녀. 핵심은 창녀라는 단어로 인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선입견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 이걸 그저 돈으로 샀다면 소설이 완성될 수 없겠지만, 이게 '짧고 놀라운 삶'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와오한테는 충분히 그럴 것 같다. 결국, 위험을 감수할 만큼 컸는지. 소설이라도 주인공이 죽었으니. 그렇지만 그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작가는 힌트를 남겼다.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서.


"그녀가 예고 없이 그의 무릎에 살포시 앉아 목에 얼굴을 살며시 기댄다든지 하는 그런 친밀함, 그가 그때껏 숫총각이었다는 말을 그녀가 들어주는, 평생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커플만의 친밀함, 그 오랜 기다림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자고 제안한 건 이본이었다. - 뭐라고 부르지? - 글쎄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게 바로 이런 거로군, 이렇게 늦게야 알게 되다니, 이토록 아름다운 걸! 이 아름다움을!" (p.389)



와오는 틀림없이 글쓴이와 비교되는 것을 정말 싫어했을 것 같다. 끊임없이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는 그 꿈을 실현하고 싶었던 욕망의 남자이면서, 누구한테 한 번도 남자친구라고 소개받지 못한 남자라는 공통점만 빼면 너무나 다른 삶이지만, 길면 좋겠지만 짧더라도 놀라운 그 무엇. 그게 사랑이라도 우리 안 머릿속에서 그걸 갈망하고 살지 않던가. 이게 없다면, 적어도 당신은 젊은것 같지 않다. 아님, 세상을 다 아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거나.


소설을 읽다 보면 도미니카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과 트루히요의 '저주'가 주는 그 연관성을 깨닫지 못함에도 소설 속 주인공 와오를 통해, 우리 모두 저주(푸쿠)의 자식이지만, 결코 세상에는 저주는 없다는, 삶만이 있다는 것만은 꼭 기억하기를 바랄 것이다. 이게 작가가 가장 말하고 싶었던 말 일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고 나서 알게 된 한 가지. 와오의 삶을 보면서 배운 단 한 가지. 세상엔 저주가 있어도 이를 끊어내는 건 결국 우리라는 것과 그곳엔 오직 삶이 있다는 것뿐. 역시나 그래서 이게 '인생'임을 알게 하는 게 저주를 푸는 주술이면서, 역시나 와오의 짧지만 놀라웠던 삶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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