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바한테 배운 두 가지.

니코스 카잔차키스(2018). 그리스인 조르바. 느낌이있는책.

by 길문


인간의 자유와 자기 해방에 대한 욕구가 강렬한 작가.


프랑스 파리에서 베르그송과 니체를 공부하면서 사상의 변화를 겪는다. 베르그송을 통해서 인간이란 신에 의해서 창조되지 않았음을 배웠고, 니체의 《초인》를 통해서 신은 죽었을 뿐만 아니라, 부처에게선 인간을 속박하지 않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또한 여행을 통해 깊은 사색과 사고를 실천했던. 그 과정에서 종교에 대한 환멸을 경험하기도 한. 스스로 염소의 먹이라고 비하한 책에 익숙한, 책을 통해서 세상을 배운 지식인.


발칸전쟁을 통해 그리스를 해방시키는데 일조를 하고, 석탄사업을 직접 행한 기업가이면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직접 몸으로 보여줬다고 본 조르바를 통해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몸으로 체득한.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세상에 던지고 간. 그럼 그는 철학자일까? 작가는 확실한데 말이다. 활자를 통해 지식으로 만들어진 세상 너머, 그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살다 간 조르바를 보며, 어떻게 사는 게 자유와 자기 해방을 얻는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 시대를 산지식인.


그런 그는 정작 스스로 자유와 해방을 습득하고 그렇게 살았을까? 그는 조르바를 동경했지만, 조르바를 넘어서 내지 조르바처럼 살지는 않았던. 이게, 지식인의 숙명일까? 부처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리스 수도사들처럼 온갖 고행을 거쳐 '생각'과 '마음'이란 결론에 도달하지만. 니체처럼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지 않았더라도 인간 스스로 느낀 그 숙명을 작가는 탈출했는지. 이게 그가 진짜 원하던 것일까? 종교에 대해서만큼은 직접 그가 목격한 그리스 아토스 산에서 고행을 일삼던 수도사들을 보며 회의를 하게 되고, 이게 조르바에게 더 감정을 이입하게 된 것은 아닐는지.


조국 그리스를 튀르키예로부터 독립시키고, 인간이 갖는 무지와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종교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궁극적인 절대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가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던 인간이 해탈된 상태인 절대 자유와 자기 해방을 누리는 세상을 그는 보고 죽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질문과 더불어 든 또 다른 생각. 작가가 세상에 대한 지식을 쌓고 여행을 통해 깊은 사색 과정을 거치기 전에 먼저 조르바를 만났으면 어땠을까? 조르바가 인간이 갖는 한계를 벗어난 진정 자유인으로 보였을까? 카잔차키스에게 영향을 미친 마지막 인물이라고 해서 든 생각이다.


어떤 이에게는 이 책이 인생 책일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조르바를 보며 과연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게 과연 어떤 것인지, 조르바처럼 하고 싶은 데로 마음먹은 데로, 거리낌 없이 행하는 게 진정 자유롭고 해방된 인간인 것인지? 소설 속 조르바가 살아온 방식을 이해한다고 해도,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그러지 못했듯이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니체가 여전히 누군가의 분석이나 해석의 대상이 되는 철학자임에는 틀림없지만, 니체를 알거나 안다고 얘기하는 그 어떤 이도 니체처럼 살거나 니체를 넘어서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 않음은 왜 그런 것일까?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세계적인 문호로 알린 《조르바》가 출판된 것은 1942년이다. 이 책을 읽은 나는 2023년을 살고 있다. 무려, 81년이나 지났다. 카잔차키스가 느꼈던 시대 아픔과 존재에 대한 생각들을 고스란히 독자가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소설 속 주인공이자 실제 인물 조르바가 보여준 행동들이 정상처럼 보였을까? 기행 같은. 그의 여성 편력과 폄하가 평생 남성(?)으로 살아가는 나도 읽는 내내 불편했다. 아직도, 주변에 이런 수컷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이 바뀌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소설 속 조르바의 모습이 작가가 그렇게 갈구한 인간 스스로 자유를 누리는 해방된 모습인지는 잘 모르겠다.


언젠가 튀르키예와 그리스를 같이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제야 그리스인들이 느끼는 튀르키예 대한 적개심이 어떤지 제대로 들은 적이 있었다. 무려 400여 년의 지배 기간. 그 후 튀르키예와 그리스는 끊임없는 반목을 이어가고. 그래서 소설 제목이 그리스인 조르바가 될 수밖에 없음을. 그때 그리스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더라도, 아니, 정치적 이해와 판단을 벗어나서 조르바를 이해를 해도, 조르바에 대해 작가의 감흥만큼은 잘 전달되지 않았다. 이 말인즉, 조르바에 대한 묘사라는 것도 결국 작가의 머릿속을 거쳐 나온 것이기에 결국 조르바가 아닌 작가 카잔차키스의 생각일 수밖에 없더라도, 조르바의 가치관과 생활에 대해 다 공감하지 못했다.


책을 읽다 보면 군데군데 작가가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 도드라지게 서술된다. 결국, 그게 소설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지만 말이다. 작가는 그렇게 이 책을 통해 자기가 느껴온 자유와 인간해방과 종교의 허물, 더불어 신의 부재에 대한 생각을 녹여낸다. 그중에 신에 대한 부분만을 살펴보면,


"왜 사람들은 죽어야 하는 것입니까?"

"나도 모릅니다, 조르바."

"모른다고요!"

"아니, 당신이 읽은 그 많은 책들은 다 무엇이요? 그게 뭐가 좋다고 읽고 있는 거요?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책이 없다면 도대체 뭐가 쓰여 있단 말입니까?."


"나는 알고 있었다.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은 지식도 미덕도 선도 승리도 아닌 보다 훌륭하고 보다 영웅적이며 보다 절망적인 것, 즉 세계에 대한 신성한 경외감임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p.458~459


그렇다고 작가가 느낀 조르바처럼 사는 것이 여전히 동서양을 넘나들며 지식을 쌓은 지식인들에게 이상적인 인간으로 여겨지는 것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작가가 주인공으로 표현한 그가 결국 작가의 페르소나임을 부정할 필요도 없고, 그가 작가에게 절대 자유가 뭔가를 보여주는 '초인'이라는 것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작가는 금욕과 사유를 통해 삶이란 뭔가를 깨닫으려는 지식인이었고, 자기 자신과 종교, 이념, 타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조르바야말로 작가가 닮고자 했던, 작가가 보기에 그게 자유인의 모습일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젊은 지식인인 소설 속 내가 세상을 이미 살아본 거친 육체노동자와 함께 탄광에서 일을 하며, 종교와 정치, 인생과 삶,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소설에서 구현하지만, 진짜 조르바와 이런 대화를 나눴을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건 소설 너머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런 태도는 주변을 둘러봐도 대게의 지식인들이 그렇듯이 조르바처럼 거침없이 본능적으로 살아가지 못함을 익히 보고 있지 않던가.


조르바가 일자무식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던지는 질문들이 결국 작가의 질문이라는 거야 당연하지만, 누군들 열심히 일하고 뜨겁게 사랑하며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자기에게 솟아나는 모든 열정과 욕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체화하고 발산하는 삶. 이를 대표하는 조르바. 그걸 부러워하는 게 부끄러울 일도 아니지만, 그게 진정 자유스러운 삶이란 것을 받아들일 필요는 있겠다. 우리도 그렇듯이 조르바처럼 거침없이 본능적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사회적 동물이란 이미 사회에서 제도화된 관습, 문화, 생각까지도 이미 받아들여서 살기 때문인데, 카잔차키스만큼은 아니지만, 조르바가 오늘을 사는 내게 주는 교훈 두 가지는 다시 되새겨야 할 것 같았다.


우선, 오늘만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지나치게 과거를 반추할 필요도 그렇다고 내일을 생각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는. 지금 이 순간, 오늘 말이다. 다른 하나는 내 안에 느낀 열정이나 욕망을 제대로 실현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게 뭐든 말이다. 조르바가 행한 기행이 아니라 마음 가는 데로 거리낌 없이 승화시키는. 그게 꿈과 목표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적어도 이 두 가지는 조르바, 아니 작가가 한참 인생후배에게 하는 말 같아 명심할 것 같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이다같이 시원한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