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 버틀러(2016). 킨. 비채.
킨. 처음 듣는 단어는 아니었다. 왜냐고? 사이다 때문이었다. 킨하면 킨 사이다가 떠올랐다. 음료수 제목을 소설 제목으로 쓸리가 없으니, 원제목은 킨드레드(kindred)였다. 킨 이나 킨드레드나 일가친척이란 뜻이지만, 킨드레드보다 킨이 훨씬 잘 어울린다. 출판의 힘인 것 같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왜 킨이라고 하지 않고 킨드레드라고 했을까? 출판과 관련된 어떤 문화적인 차이가 있었을까?
킨 사이다는 1976년 한국 코카콜라에서 국내용으로 만든 브랜드명이다. 이런! 소설 배경 중 현대의 시점이 1976년에서 시작하는데 묘하게 겹친다. 킨 사이다가 만들어진 해이고. 그렇다고 소설과 무슨 연관성이 있었냐고?
소설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1976년을 살던 22세의 흑인 여성 다나가 어느 날 갑자기 1819년 메릴랜드로 이동한다. 시간도 바뀌고 공간도 바뀌게 된 것이다. 본인 의지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이게 본인 의지로 여행을 하면 시간 여행이라고 부르는데, 이게 기존 시간 여행과 다른 점이다. 작가는 이를 정말 잘 활용해서 소설을 썼는데, 이게 뭔고 하니 타임슬립(timeslip)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람이나 집단이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가거나, 시간을 앞질러 미래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건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현상에 의한 것이기에 시간 여행과 다른 것이다. 그렇다. 시간 여행은 타임머신을 타야 한다. 타임머신! 타임슬립은 그렇지 않아서 굳이 이를 설명이나 묘사할 필요가 없다. 훨씬 스토리를 전개하는데 더 편한 것 같다. 시간을 넘나드는 능력을 제어하거나 이해할 수도 없으니, 굳이 그 원리를 독자에게 설명할 의무도 없다. 그래서 SF에서 자주 활용했구나.
그럼 다나는 왜 시공간을 넘나드는 것일까? 그 원인은 그의 조상 루퍼스가 목숨이 경각에 달릴 때마다 그를 구해주러 가는 것이다. 어떻게? 묻지 마시라. 이래서 그녀는 루퍼스를 구하고, 그녀가 죽을 것 같은 위험에 처하면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그렇게 간단하긴 한데, 소설이 시작되는 시점은 읽는 이로 하여금 그리 편하지 않다. 프롤로그 첫 문장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왼팔이었다." 이 말 뜻을 소설 에필로그를 읽고 나서야 이해가 되었다. 그랬구나. 고약한 조상이군. 서로 목숨을 위험에 빠드리다니.
다나도 결국 루퍼스가 없다면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루퍼스를 다나가 죽이고, 그런 과정에 루퍼스는 다나의 팔을 잡고 있었고. 그 순간 타임슬립이 일어나고 그래서 그녀의 팔은 기계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맞물려 들어가, 벽에 붙어 버렸다. 에구, 끔찍해라. 정확히 루퍼스의 손가락이 붙들고 있던 바로 그 자리. 그래서 그녀는 왼팔을 잃게 된 것이다. 그런데, 루퍼스가 위험할 때마다 다나가 나타난 것인데, 루퍼스의 목숨을 다나가 정리하다니. 다나는 그녀의 조상을 없앨 수 없어야 하는 것 아니던가?
아, 이해가 되었다. 그사이 루퍼스와 흑인 노예 여성 앨리스 사이에서 아이가 생긴 것이니, 다나의 조상은 루퍼스가 죽어도 앨리스의 애들이 살아만 있으면, 당연히 살았으니, 다나는 계속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그럼, 후대의 다나가 자기 조상을 지키려고 타임슬립을? 어떻게는 묻지 마시라. 이건 논의의 대상이 아니란다. 초자연적인 현상이니. 그럼 조상은?
루퍼스는 앨리스와 다나 둘 다 좋아했던 것이니, 앨리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나서 루퍼스는 다나에 대한 생각을 달리했을 것 같다. 이게 비극의 단초가 되고. 앨리스가 죽고 루퍼스는 "살면서 이렇게 외로웠던 적이 없어"라고 다나한테 말한다. 그때, 다나는 "그를 나의 조상으로, 나의 남동생으로, 나의 친구로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나의 주인으로, 나의 연인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라고 말하는데, 이게 받아들이지면 다나의 가계도는 엉망이 된다. 거기에 다나는 현대인인데 말이다. 소설이 애초 불가능했겠지?
시대는 노예제 시대의 미국이라 농장 주인은 흑인 노예를 맘대로 처분할 수 있었다. 거기에 백인 농장주는 흑인 여성도 맘대로 취할 수 있었으니. 그렇다고 이 소설이 미국 흑역사를 고발하는게 원래 목적인 것 같지 않다. 시대 배경으로 인해 노예 문제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작가 또한 흑인 여성이라 이는 자연스레 내용 속에서 인종 문제가 핵심이 된다. 한 여성이 자기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소설이라고 당연시할 수 없지만, 당시 시대와 현대가 오버랩되면서 자연스럽게 비교가 된다. 노예 시대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건 캐빈이 백인 남성이라는 데서 굳이 언급할 필요성도 없지만, 과거로 빨려간, 그것도 다나 때문에, 캐빈이 느낀 시대상도 어땠는지 궁금해진다. 그럼, 소설 내용이 산으로 갔겠지만 말이다.
책을 읽다 보니, 과거로 돌아가면 현대의 시간 몇 분이 몇 년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어차피 배경이 과거다 보니 불가피하지만, 이렇게 타임슬립으로 여행을 가면 과거가 훨씬 풍부해질 것 같다. 그럼, 현대의 삶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달라지겠지? 그런데, 다나는 웬 팔자가 세서 과거로 돌아가 그 고생을 했던가?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남성이 주인공이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하나 더. 주인공 다나는 자신의 조상에 대한 계보뿐만 아니라 당시 1800년대 노예해방의 역사를 이미 알고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들이 간간이 등장한다. 노예제가 성행했던 남부에서 북부 자유주에 대한 언급도 드러내지만, 본격적으로 이를 다루지 않는다. 다나가 과거로 휘릭 전송된 그 시점에선 노예해방운동이 더디 이뤄진 시점이기도 하고, 아무리 소설이라도 역사적 사실을 뒤집을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후속편은 콜슨 화이트헤드(2017)가 쓴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에 흥미진진하게 묘사된다. 그게 과거 얘기라면 좀 더 현대의 인종 문제는 역시나 그가 쓴 《니클의 소년들》(2020)을 참조하면 될 것 같다. 흑인이면서 퓰리처상을 두 번 수상한 작가라니 그 내공이 역시나~다.
그렇지만 이 작품과 화이트헤드 작품을 직선적으로 비교하긴 무리일 것 같다. 누가 더 시대를 아파하고 더 비판했는지는 말이다. 정말, 그랬을까? 마음은 이미 콜슨 화이트헤드에 가 있는데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