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유발 하라리(2018).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김영사.

by 길문

태양의 수명이 100억 년이라니 아직 멀었다. 보이저 1,2호가 태양계를 벗어났는데 아직도 외계인의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이 둘도 아니군. 2022년 7월 나사가 알려준 제임스 웹 망원경이 찍은 사진 용골자리 성운 등을 보니 지구에서 거리가 거기까지 약 7600광년 떨어져 있다는데, 도무지 계산이 안된다. 그게 얼마나 먼지.


정말, 감동적인 건 누구도 지금까지 상상하던 그 어떤 우주에 대한 사진보다도 광대했고 멋졌다. 이건, 사피엔스 기억에 없던 새로운 사진이다. 그래서, 그 먼 어딘가에 생명체가 없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어디서 외계인이 날아와 지구라는 행성과 인류를 파괴할 것 같지는 않다. 당분간. 그럼 사피엔스 때문인가?


유발 하라리는 핵전쟁과 생태계의 붕괴, 기술적 파괴가 합쳐지면 전례 없는 실존적 위기에 처한다는데, 이게 사피엔스의 멸종을 의미하는 건 아니겠지? 러시아의 푸틴이 제국의 부활을 외치며 남의 나라를 침략했는데, 그로 인해 서방과 대결이 극대화된 핵전쟁이란 파멸로 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 종이 멸종까지? 전쟁이 날 가능성이 높아지긴 하지만 말이다.


위기에 처하면 종교가 다시 필요할 수도 있겠다. 위기에 처하지 않아도 종교가 여전히 존재하는데, 사피엔스(2015) & 호모 데우스(2017)가 그렇게 설파해도 종교에 대한 열망이 가라앉는 것 같지 않다. 우리의 경우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추세는 종교를 갖지 않는데 시야를 한반도 밖으로 돌이면 이게 대세는 아닌듯하다. 전체 종교인의 숫자가 줄어들던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 다시 종교의 순기능이 필요해질 것 같다.


인간의 지능을 표현한 인공지능이 단순한 알고리즘을 넘어서기에 그 위험성이 무수히 경고되고 있는데 해답이 없을까? 자연의 파괴에 대한 대안으로 ESG(environment, social and governance)가 냉전 후 자유주의의 승리로 고착한 시대 변화의 해법이 될까? 데이터를 소유하고 이를 통제하는 알고리즘 체계가 고도화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데이터 디바이드의 확산을 어떻게 대처할까? 데이터를 소유한 소수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 거라는데, 인정해야 할 것은 그런 위험이 증대되는 것은 맞다. 개인정보 유출이라던가. 심지어 소비욕구의 조작까지.


그런데, 이런 시각이 새삼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정보격차의 문제 등). 어디서 본 듯한. 기술결정론의 연장선 같기도 한데, 보다 정교해졌지만, 그 위험도 더 커지고. 그땐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이 있어서 이론적 방어가 어느 정도 된 건데, 이제 이런 논의가 없는 듯하니, 테크놀로지 푸시(push)가 전적으로 시대 변화의 가장 큰 동력인가 보다. 나아가서, 알고리즘과 인공지능 등 그 폐해가 현실화되고 있다는 게 맞는 것일까? 이세돌이 알파고에 졌지만, 그 후 바둑 인구가 뚝 떨어졌을까? 이것도 궁금하다. 그럼 인공지능이란 테크놀로지는 이게 대체재일까, 보완재일까?


우린 편리의 대가로 많은 정보를 누군가에게 제공을 하지만, 예전에도 신용카드 회사는 사람의 소비패턴을 알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가 쓴 과거를 축적하고 분석하지 않았던가? 지금 알고리즘이 더 세밀하고 강력하게 데이터를 분석하고 응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 뇌가 하던 일들을 기계가 아주 쉽게 수집하고 분석해서 더 효율적으로 데이터를 가공, 처리, 분석, 활용하고 있다. 궁극에는 하라리의 지적처럼 인공지능에 판단을 맡기게 될 때 인간 스스로 삶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고, 이를 정부나 기업이 착취할 수 있다는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알고리즘에 기반한 데이터를 인공지능이 가공하고 처리하는 과정에 익숙해질 때 거기 '너'는 없을 거란 지적은 섬뜩하기도 하다.


그런데, 답이 너 자신을 알라라면, 네가 누구고 무슨 생각을 하고 네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 지을 끊임없이 하라는데, 이게 답일까? 생각해 보면, 그가 서술한 5장 회복탄력성 중 '교육'이 답일 수 있겠다. 그 교육이 변화만을 유일한 상수니까. 이건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이걸 로봇이 대행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전체적인 방향은 인공지능이 넘볼 수 없는 주제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의사소통을 하며, 인간이 스스로 협력하면서 창의성을 확대해 나가면 되는 것도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질 내용은 일자리일 것 같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가장 큰 숙제. 일자리. 인공지능으로 인해 앞으로 변할 노동시장, 이게 초미의 관심사가 될 것 같다. 여기에 더 나은 일자리와 기회를 찾으려는 노력. 어떻게 할 것인가? 대안은? 이미, 제조업에서의 공장자동화가 많이 이뤄졌지만, 이로 인해 엄청난 실업자가 발생했는지 기억에 없다. 기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1800년대 초반에 벌어졌던 러다이트 운동(기계파괴운동)을 떠올리면 결과적으로 이 운동은 성공적이지 않았다. 반면에 산업혁명은 성공적이었고. 그로 인해 물질적 풍요도 어느 정도 이뤘으니 말이다.


앞으로 새로운 러다이트 운동을 벌여야 할까? 이미, 기계와 인공지능에 기반한 생산성이 인간의 직접적 노동의 효율성보다 더 높아진 것 확실할 텐데, 그렇다면 새로운 직업이 끊임없이 창출되면 좋으련만, 완전히 등가의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을까? 이건 유발 하라리도 정확히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다. 분명한 건 인공지능과 기계가 인간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점차 늘어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심지어 예술 분야도. 결국, 다른 무엇보다도 먹고사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잠시 심각한 내용을 접어두고 딴 길로 가보자.


가장 인상적인 하라리의 지적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직관이 어떤 패턴이 반복된 후 그에 대한 인식으로 드러나고 감정과 욕망이 사실은 생화학적 알고리즘에 불과하다는. 그렇다면 그동안 '직관'과 관련된 일들은 인공지능이 훨씬 뛰어날 것은 당연하고, 생화학적 알고리즘을 해석하고 처리하는 것도 당연히 컴퓨터가 월등히 높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이 융합되는 분야는 더욱 인간보다 나은 성과를 보일 수밖에 없어 이에 대한 직업도 안심하기 어려운 분야이다. 그런데, 하라리가 자기 남편에 대한 애정도 결국은 뇌가 분비하는 호르몬작용이라는 것을 알 텐데 그럼에도 그는 그를 좋아하겠지? 사랑이 뇌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변화 중 하나라고 해도 이를 마다할 인간이 얼마나 될까? 알면서 말이다.


다시 일자리 얘기를 예술 분야에서 더 해보면, 이쪽도 크게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다음의 사례는 일자리가 예술 분야까지도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휴머노이드 로봇에 의해서 말이다. 2022년 10월 휴머노이드 로봇 에이다(AI-DA)가 영국 의회 청문회에 불려 나갔다. 미래 AI가 얼마나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지 알아 볼기 위한 목적이라는데, 이 에이다는 시, 그림, 예술 활동을 직접 작업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그 원천 데이터는 인간 누군가가 해놓은 업적들을 카피한 것인지만 말이다. 이 로봇은 2019년 영국의 프로그래머, 로봇공학자, 미술 전문가, 심리학자가 만든 건데, 이게 아니라도 인공지능이 예술 창작까지 확장될 수 있다니. 이제, 예술가들도 어떡하지?


이 책에서 눈여겨볼 다른 하나는 탈진실(post-truth) 부분이다. 이제 진짜와 뭐가 가짜인지 점차 구분이 어려워졌다. 그게 뉴스라면 더욱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더불어, 유튜브 등 기존 언론매체를 넘어선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고 이들 매체가 뉴스를 만들어내다 보니 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리송해지는 시대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게 미치는 파장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하라리는 이에서 더 나가 "1,000명의 사람이 어떤 조작된 이야기를 한 달 동안 믿으면 그것은 가짜 뉴스이다. 반면에 10억 명의 사람이 1,000년 동안 믿으면 그것은 종교"(p.351)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라리의 최대 공적은 아마도 자기가 속한 유대교뿐만 아니라 이슬람이나 기독교 등에서 금과옥조로 받들어온 신을 탈 신격화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좁은 의미의 종교보다 더 큰 의미의 종교가 주는 의미가 사라졌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종교의 의미를 너무 좁힌 것은 아닐까?


우린 아직까지도 이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 잘 모른다. 그렇다고 그 영역을 신의 영역으로 놓자는 게 아니다. 믿을 사람은 어떻게든 종교를 믿을 텐데, 오히려 하라리도 지적했듯이 위협에 처한 사피엔스를 구할 새로운 공동체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이를 위해 종교가 필요할 수도 있을 거고. 한편, 우리가 이해하는 우주란 것도 겨우 3차원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보는 세상일 텐데, 그 이상의 차원을 경험한 이가 있던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도입되고, 끊임없이 생태계도 파괴되는 현실과 핵전쟁의 위협 속에 우리가 살고 있어도 이게 유토피아가 될지 디스토피아가 될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인공지능은 아닐 것 같다. 결국, 인간의 손에 결정되지 않을까?


혹여나 미래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야 할 것 같다. 우리 인류는 이미 무수히 많은 전란을 통해 이성이 결코 완벽하지 않음을 겪었음도 살아남지 않았던가. 생각한 번 해보자. 인간이 신처럼 완벽하진 않아도 그렇게 어리석지도 않음을 생각하면서 사례를 찾아보았다. 그 시발점은 키네틱 아트(Kinetic Art)이다. 앞에서 인공지능이 예술의 영역을 대체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에이다(AI-DA)의 사례도 있지만, 반대로 테크놀로지와 예술이 접목되어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만들어내는 사례도 있다.


키네틱 아트는 움직이는 예술이란 뜻으로, 어떤 수단이나 방법에 의해서 움직임을 나타내는 작품을 말한다. 잘 모르는 영역을 아는 체하기는 그렇고 핵심은 이 용어의 정의 중에 단순한 테크놀로지를 넘어서 컴퓨터를 활용한 작품도 키네틱 아트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게 왜 중요하냐고? 테크놀로지와 자연과의 조화 때문이다. 테크놀로지가 그냥 자연과 조화되어 예술로 승화되던가? 그럴 리가? 이건 인간이 없으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연으로 이를 실현하는데, 그게 새로운 형태의 멋진 예술로 승화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미술 분야 중 회화가 카메라(테크놀로지)의 등장으로 더 이상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조형미나 개념을 탐구하게 됨으로써 현대미술이 풍부해졌다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상을 사실처럼 묘사해야 할 의무가 사라짐에 따라 추상미술이나 마르셀 뒤샹 이후 개념미술이 등장함으로써 현대미술은 무척이나 풍부해졌다. 대부분의 일이 일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이 개입한다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유발 하라리의 책을 읽다 보면 뭐가 21가지 제안인지 궁금했었는데, 눈 씻고 쳐다봐도 하라리가 했을 제대로 된 제안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원래 단어인 교훈(lessons)으로 책을 읽으니 책의 내용이 크게 부정적이지 않은 것 같다. 출판사의 의사로 이 책이 출판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지만 어차피 그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탁월한 이야기꾼임은 확실하지 않던가. 여기에 다가오지 않은 앞날을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무수히 많은 성현들이 말씀하지 않았나 '오늘을 살라고.' 그래서 언제 테크놀로지와 사회와 인간이 조화될 수 있는지 확언하긴 어렵지만 크게 걱정할 것 없을 것 같다. 테크놀로지가 주는 디스토피아를 말이다.



https://studiodrift.com/

ps. 위 링크에 나오는 사례들을 보면 자연 현상에서 아이디어를 취해, 인간이 테크놀로지를 활용해서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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