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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시 돌아갈래'

헬레나 호지(2016).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중앙북스

by 길문

"나 다시 돌아갈래."

영화 박하사탕 주인공 영호(설경구)가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외친 말이다. 그 후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린 살다 보면 나 돌아가고 싶다고 외칠 때가 있다. 그게 많다고? 그럼 좀 곤란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정말 시간만 돌릴 수만 있다면 많은 것이 우린 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럴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믿음만 자꾸만 생겨서 문제지.


그런데, 정말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지 않던가? 딱 한 번 소원이 이뤄진다면 당신은 언제로 돌아가고 싶을까? 미래로도 가고 싶어 할까? 그렇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달라질까? 많은 사람들이 정말 많이 바란다면 세상이 좀 혼란스러워질 것 같은데, 그래도 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타임리프(time leap)는 생각만 해도 멋지다. 실현만 된다면 말이다.



여기 한 여성학자가 있다. 언어학자이면서 작가이면서, 사회운동가이기도 한. 그녀는 라다크라는 지구상에서 오지 중의 오지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우리 다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단순하게 주장만 한 게 아니라 책을 썼는데 그게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 Learning from Ladakh)다. 오래된 미래라니. 형용모순 아닌가? 미래는 앞날인데 오래되었다고? 그러면 그녀는 단순히 그녀가 처음 머물렀던 16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일까? 그럴 리가. 그녀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썼겠지. 그렇지만 그녀는 '우리 돌아가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게 우리가 사는 방법이라고 말이다. 영화 속 주인공 영호는 죽었지만.


선한 영향력. 영향력이 큰데 나아가서 선하다면. 그게 너 나 우리를 넘어 남과 모두에게 전달된다면? 힘이란 이럴 때 제대로 쓰여야 할 텐데, 적어도 그녀는 자기가 가진 능력을 어떻게든 선하게 활용하려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게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다. 이럴 때처럼 선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을까? 그저 평범한 내가 어느 날 책을 읽고 더 알고 싶어 그녀가 말한 내용이 지금 어떻게 달라졌는지 찾아보다니. 책 내용이 그리 새로울 것 없었지만, 책 제목도 멋지고 내용도 멋지고 그녀의 삶도 멋져 보인다.


그녀가 이 책을 쓴 게 1992년이고 한글판 초판이 나온 게 2007년이니 벌써 아득하다. 그녀는 언제부터 라다크에 머물렀을까? 그럼 지금 라다크는?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하고 '새마을 운동'을 시작한 게 1970년부터이니 지금 우린 잘 살고 있던가? 그렇다. 우린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우린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제법 성공적으로 치른 것 같다. OECD 국가이기도 하고,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으니. 그럼 다 된 것 아닌가?


그런데, OEDC 국가 중 자살률이 20여 년 동안 계속 1위이고, 다른 국가보다 평균 자살률이 두 배라는 대목을 보면 뭔가 이상하다. 잘 먹고 잘 살자는 구호 아래 열심히 살았는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별로 행복하지 않았나 보다. 수치상 빈부격차가 커진 것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심리적으로 국민들도 행복하지 않다니. 생존경쟁은 전보다 더 치열해지고, 사회 공동체가 주는 가치는 진작에 무너진 것 같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사실, 우리는 뭐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면서 살아가는데, 이 여성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잊었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지나 온 과거에 있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오래된 미래'라고. 그것도 라다크에 살아 본 경험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 울림이 크다. 평균 해발고도가 3500미터가 넘는 곳. 겨울에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는 기간이 8개월이나 되는 산간지역이 1974년부터 개방되면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그때부터 그곳에 살던 여성학자가 던지는 화두. 공동체가 파괴된 윗단을 찾아보니 그게 세계화였고, 이로 인해 파생된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법이 지역화임을 주장하고. 전 세계가 사슬처럼 엮인 경제구조를 바꾸자는 외침. 지역단위 경제로 돌아가 우리가 잊었던 본원, 그 모습을 되찾자는 작가.


시작은 인도령으로 묶인 이 지역을 인도 정부가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개발하면서였다. 예로부터 이 지역은 티베트 불교의 영향 아래 자급자족 경제를 이루고 살아온 평온한 지역이었다. 빈부격차에 대한 인식도 없고, 종교 대립도 없으며,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평화로운 곳. 그런 그곳에 분 변화의 바람. 변화의 압력이 외부에서 시작된지라 부작용도 심하게 겪는 그 과정을 작가가 살면서 지켜본 것이다. 산업화란 이름, 근대화란 이름이 어떻게 공동체를 파괴하는지 말이다. 결론적으로 라다크가 세계화란 공급망 사슬에 밑바닥으로 엮이면서, 공동체가 파괴되고 빈부격차와 종교 간 반목까지 겪었던 과정. 어떻게 개발의 다른 이름이 '파괴'인지 말이다.


어느 날 무역 장벽을 없앤 나프타 협정이 FTA로 활성화되고, WTO가 중심이 되면서 가속화하기 시작한 세계화(globalization). 이게 산간 오지 라다크에 불어닥친 것이다. 그 나비효과는 바람직했을까? 값싼 노동력과 제품이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교환되는 시스템을 낳은 괴물이 경제적 이해에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결부됨으로써 어느 정도 불가피하더라도, 여기에 미디어를 통한 서구 문화에 대한 환상까지 덫 칠해졌을 때 라다크가 겪는 공동체의 붕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그는 이를 다 지켜본 것이다. 그곳에 살면서. 그러면서 찾아본 대안.


이게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인간의 노동이 화폐로 치환됨에 따라 나타나는 물질만능과 돈이 전부가 되는 세상. 세상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해도 바꿀 수 있다는 믿음과 활동. 그 대안으로 지역화를 통해 공동체를 복원하자는 그녀의 외침. 우린 이미 세계화에 편입되어 그로 인한 부작용을 알면서도 모른 체, 혹은 그저 소박하게 순응하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던진 질문이 얼마나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작동할지 확신하긴 어렵지만, 그녀가 믿는 '오래된 미래'가 작용과 반작용으로 지금까지 작동되어 온 우리 세계를 보더라도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누군가 한쪽에선 끊임없이 파괴를 하면, 한편에선 누군가 끊임없이 복원을 주장하는 희한한 우리 인간. 이게 회복 가능성(resilience)이란 신호임을 알지만, 이 신호대로 100% 복원될지 장담하기 어렵지만, 개발과 탐욕이란 가면을 쓴 인간보다 그래도 화장 안 한 맨 얼굴이라도 공존과 복원을 주장하는 그들이 멋져 보이는 건만큼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문제는 숙제를 우리가 같이 해야 한다는 것. 늦게 읽은 책이지만 책이 말하는 주장들이 어느 날 태풍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오길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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