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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렸다. 이중섭 -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by 길문

전시

이중섭 -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2022.8.12 ~ 2023.4.23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 전시실


마음이 아렸다. 누구든 이렇게 죽으면 마음이 아플 것이다. 짧은 생. 그는 생을 다 알고 갔을까? 그를 제대로 알고 간 건 아니었다. 몇몇 대표작은 워낙 유명해서 정말 미술에 무심한 사람이라도 조금 알지 않던가. 그가 그린 작품들을 다 둘러보다 마지막으로 입구 왼편에서 상영하는 영상을 봤다. 작가 영상이 특별히 비극적이지 않았다. 그 시절 사진은 의례 흑백이고 관련 사진으로 영상을 만들었는데, 그럼에도 마음이 아렸다. 짧게 살다 갔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명횡사, 객사 어떻게 표현하든 그는 그렇게 떠났다. 1916년에 생해서 1956년에 몰했으니. 짧긴 짧다. 그것도 예술가인데 말이다. 마지막은 건강하지 않은 정신상태에 육체적으로는 영양실조와 간경화까지 왔고, 연고 없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한 많은 이 세상이었을까? 그럼 저 세상에서는?


이번 전시는 1940년대 연필화, 엽서화로 구분하고 1950년대 은지화, 편지화로 나눠 전시를 했다. 전자는 일본 유학시기부터 원산시절까지, 후자는 통영, 대구, 제주도 등 남한에서 지낸 시기의 작품으로 구성했다. 그리고 1950년대 회화 중에서 '새와 닭'과 '어린이'로 따로 분류했다. 고 이건희 회장이 남긴 1,488점의 작품 중 90여 점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했던 그의 작품 10점을 모은 전시. 그를 국민화가로 표현하던데, 살아있는 가수를 예술가로 높이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국민가수라는 이름까지 붙이는 풍토에 거부감이 많았었다. 언어 인플레이션. 가뜩이나 물가가 오르는데, 언어 때문에 인플레이션이라니. 그렇지만, 다 둘러보고 나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국민화가. 빈말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그림을 보다 보면 그렇게 느껴졌다.


짧은 시간 둘러보았지만, 계속 머리에 남은 작품들은 닭과 새, 물고기와 게, 아이들, 주로 가족과 관련된 그림이었다. 이래서 '국민화가'였을까? 소재가 소박했다. 일제강점기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 시절 일본으로 유학까지 갔던, 1943년 태평양전쟁으로 원산으로 돌아왔다 한국전쟁이 난 후 가족을 이끌고 1950년 월남해서 홀홀 단신 세상과 맞선 예술가. 피란으로 인한 생활고로 어쩔 수 없이 두 자식과 일본인 아내(야마모토 마사코)를 일본으로 보낸 후 외롭게 세상을 떠난 그가 느꼈을 감정을 온전히 그림에서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가족사와 인생사가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 녹여있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렸던 것이다.



1940년대 연필화와 엽서화


연필화


누구든 처음은 초보다. 처음부터 대가가 될 수 없으니. 그래서 선택했을 연필과 종이. 다들 그랬을 것 같다. 연필로 종이에 그린 작품이 남아있다는 게 신기하다. 잘 그린 그림이냐고? 글쎄다. 누군 처음에도 모델을 세워서 그림을 그리지 않을까? 처음부터 애인과 아내가 될 수 없으니. 그런 그가 그린 모델 야마모토 마사코. 그가 1942년에 그린 작품 〈연인〉과 〈소와 연인〉이 특별히 끌렸을까? 그것 보다 그가 그린 〈소년〉과 〈세 사람〉 그림이 더 끌렸다. 그래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빛이 반사되어 참 난감했다. 유리가 빛을 반사하니 작품을 제대로 찍기 어려웠다. 남들은 이걸 어떻게 찍었을까? 작품 제목이 '소년'이니까 그러려니 하지, 소년인지 구분이 어렵다. 작품 '세 사람'은 세 사람이라는 것만 확실했는데, 보면 볼수록 이 작품들에 끌렸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난망이었다. 아니, 난망으로 보였다. 해결될 것 같지 않은 기미. 지쳐 보이는 삶이라고 할까. 그렇게 느껴진다. 음울함, 어둠, 자포자기 같은 분위기. 그땐 그랬나 보다.

왼편이 <세 사람> 오른편이 <소년> 1942년~1945년. 빛이 반사되어 사진찍는게 어려웠다.

엽서화


명필이 붓을 가리겠는가. 명필이 붓을 가리지 않을 거란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확실한 건 명필이 썼으니 명필이지만, 엽서화도 꼭 그랬다. 그가 그렸으니 엽서화라 해도 빛이 나지 않을 수 없지만, 이때까지 이중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소'라든가 '어린이'라든가 하는 그림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 엽서에 그린 그림들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는데, 1940년대 까지 이중섭이 그린 작품들이 초현실주의 경향을 띄었다는 지적 때문인 것 같다. 그가 보낸 엽서는 대부분 그의 아내인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1940년부터 1943년까지 보낸 것들이라고. 특히, 1941년 한 해 동안 75장의 엽서를 보내는데 전체 보낸 엽서 중 남아있는 엽서 수의 80%가 이때 보내진 것이라고 한다. 이게 작품들인 것이다.

<상상의 동물과 사람들> 1942년 이중섭이 마사코한테 보낸 첫 번째 엽서. 초현실주의 경향?


<상상의 동물과 여인>, <물고기와 여인들>, <바닷가의 토끼풀과 새>. 모두 1941년 작품


<사다리를 타는 남자>, 1941년. <걷는 사람> 1941년, <파도타기> 1942년, <두 사람> 1943



1950년대 회화 : 새와 닭


194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이중섭은 새와 닭을 많이 그렸는데, 닭 그림이 아니 닭이 이렇게 멋진 동물이었던가? 이중섭 하면 떠오르는 '소' 그림뿐만 아니라 '닭'과 '새' 그림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일본에서 돌아온 1943년부터 원산에 머물며 직접 닭을 기르면서 관찰하고 그렸다고. 아래 그림은 그의 대표작 <투계, 1955>이다. 두 마리 닭이 싸우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그림이 역동적이란 말은 이때 쓸 수 있는 표현 같다. 밑에 있는 닭이 수세에 몰린 것 같은데, 위에 있는 붉은 달의 기세가 엄청나다. 전체 그림 테두리를 옅은 회색으로 처리했는데, 이렇게 표현하면 이 격렬한 싸움이 지난 과거처럼 표현된다고. 다음 그림은 제목이 <부부, 1953>다. 앞에 투계가 동적이라면, <부부>도 동적이지만 느낌이 다르다. 이는 아마 싸워야 하는 닭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부부의 그 '관계' 때문인 것 같다.

<투계> 1955년
<부부> 1953년


1950년대 회화 : 아이들


이번 전시회에서 빠진 이중섭의 대표적인 그림인 '소'그림이 아니더라도 앞에서 '닭'그림 또한 상당히 인상적이었지만, 자꾸 마음을 아리게 만든 작품들은 아이들이 중심인 작품들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아이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그의 첫째 아들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디프테리아로 사망한 후라고 한다. 그가 1946년 원산의 한 고아원에서 미술 교사일을 시작한 해에 벌어진 일. 그래서인지. 그림 속 아이들이 서로 몸을 맞대고 있거나 끈을 통해 이어져 있는 것이 자기 아들에 대한 회한과 원산의 고아원 아이들 때문일 거라고 추측을 한다고. 아이들이 중심인 그림 속에서도 게와 물고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1951년 이후 제주도에서 가족과 함께 지낸 영향이 크다고 한다. 가족! 작품 소재들이 평범하면서도 쉽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게 다 이런 배경들 때문일 것이다.

<다섯 아이와 끈> 1950년대

위 작품 <다섯 아이와 끈>이란 그림을 보면 가족 간의 유대가 떠오르게 된다고. 이유인즉, 각각의 아이들이 줄을 통해서 서로의 육체를 통해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끈이나 육체의 연결은 정신적 유대를 말하는 것인데, 바로 이로 인해서 화가 자신의 정신적인 '불안'이 표현된 것으로 해석. 그림 속에서 아이들 모양이 서로 다른 것은 아이들의 개성을 표현한 것. 그런데, 정말 이상하건 아이들이 다 남자라는 점이다. 이건 어떤 의미일까? 이중섭의 자식들이 다 아들이라서 그런 것일까? 이 작품의 경우 마무리를 연필로 했는데, 연필이 초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만 사용하는 도구가 아닌 것이다. 고수는 연필로 마지막을 장식한다니.

<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1950년대 전반

이중섭은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라는 제목으로만 5점이나 남겼다고. 제주도에서 살던 시절이 배경이라는데, 위 그림에서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물고기와 게도 서로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인공이 아이들만이 아닌 것이다. 물고기와 게의 비중이 비슷하다. 이 시기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이런 설명 때문인지 그림을 보면 정말 그렇게 느껴진다. 아이들 표정이 어둡게 보이지 않는다. 앞에서 1940년대에 그렸던 연필화 그림인 <세 사람>과 <소년>이란 그림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난다. 아래 그림 <꽃과 어린이와 게>를 보고는 한참 웃었다. 게가 아이 중요 부위를 물고 있는 것 같은데, 이래서 여자 아이들이 그의 그림에는 등장하지 않은 걸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역시나 이 그림에서도 아이들과 각각의 사물들이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선 꽃과 나비로 보이는 곤충이 등장한다.


<꽃과 어린이와 게> 1950년대 전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웃기다.



<다섯 어린이> 1950년대 전반

1950년대에 그린 <다섯 어린이>란 그림 역시 아이들과 게를 연결해서 그렸다. 새도 연결했고. 다른 그림과는 다르게 끈을 사용하지 않지 않았다는 것. 아래 왼편 그림은 어린이 보다 갈치를 크게 그렸다. 이중섭이 익살스러운 면이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오른편 그림은 게를 밟고 올라서 꽃을 만지는 그림인데, 꽃도 자주 등장을 하는데, 이 꽃도 역시나 직접 연결되어 있다. 이걸 아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1950년대 이후 표지화


잡지의 표지가 작품이라고? 잡지 표지에 그린 그림들이 '작품'으로 평가를 받다니. 이를 표지화라고 한다. 그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 어릴 때 어디서 보던 익숙한 그림들. 그땐 그걸 표지화라고 했어도 그걸 유심히 보지 않았을 것 같다. 요즘에도 이렇게 표지를 직접 그려서 제작할까? 핵심은 이걸 이중섭이 그렸다는 것이다. 누구나 알만한 작가 말이다. 진시관 한쪽에 익숙한 제목의 잡지들이 있어서 뭔가 했더니 이게 다 작품들이다. 그것도 상당히 많다. 생각해 보면 그랬을 것 같다. 요즘에서야 전문 디자이너들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거나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파일을 활용해서 잡지 표지를 만들었겠지만, 당시에는 표지 제작을 결국 미술가들이 담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출판미술과 표지화. 갑자기 시간을 거슬러 올라 과거로 돌아간 것 같다.


그가 남긴 표지화들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표지화가 들어간 잡지들이 대부분 문예잡지 들이다. 현대문학, 문예예술, 자유문학, 문학 등. 이런 표지들을 따로 모았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중섭이 나온 대부분의 표지화들은 1950년에서 1960년대에 그린 것이다. 뭔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게 만든다.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아래는 표지화 중에서 유일하게 두 건을 따로 전시해 놓은 작품들이다.

왼편 <새>와 오른편 <꿈에 본 병사> 1950년대 전반


원래 이중섭이 표지화를 의뢰받고 그린 그림은 왼편 <새>라는 작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피 묻은 새가 능선 위를 날고 있는 이 그림이 군인의 용맹함이 보이지 않아 채택되지 않아 다시 그린 그림이 오른편 <꿈에 본 병사>라는 그림. 신화에 나오는 켄타우로스처럼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말의 모습을 한 병사의 몸과 칼끝을 보면 여기저기 핏자국들이 선명하게 그린 것이라고. 그가 표지화와 삽화를 그린 것은 전적으로 생계를 위해서라고 한다. 원래 의뢰를 받은 게 문중섭(?) 대령의 전투를 담은 '저격능선'이라는 수기와 관련된 표지화를 그린 것. 이런 작품들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중섭의 작품 제작 습관 때문이라고. 그는 표지화를 그린 후 이와 비슷한 그림을 그려서 그걸 일본에 있는 아내에게 보냈기 때문에 그 작품들이 남게 된 것이라고.



1950년대 : 은지화와 편지화


은지화


은지화가 뭔가 했더니 은박지에 그린 그림이 은지화이다. 처음에 껌을 쌌던 종이를 말하는 줄 알았다. 알아보니 그게 아니고 당시에는 담배를 포장할 때 알루미늄 속지를 사용했다고. 여기에 철필이나 못 등으로 윤곽선을 그린 후 검은색 혹은 흑갈색 물감이나 먹물을 솜, 헝겊 따위로 문질러 선이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했다. 김중섭을 찍었던 1954년 사진을 보면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데, 멋있게 보인다. 요즘 태어났다면 금연을 했겠지? 개인적으로 이번 그의 전시회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은지화였다. 그림들에서 묘한 감성이 느껴졌다. 이렇게 만든 은지화들을 보면 상감기법이 연상된다고 한다. 그게 뭔가 했더니 도자기에 여러 가지 무늬를 새긴 후 그 무늬에 금, 은, 보석, 뼈, 자개 등을 박아 넣는 기법이 상감기법이라고.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데 굳이 왜 담배 속지에 그림을 그렸을까? 경제적인 이유였지 않을까?

<게와 물고기와 새와 아이들> 1950년대 전반

은지화에서도 이중섭 하면 떠오르는 '게'와 '물고기'와 '새'와 '아이들'이 모두 들어가 있다. 이중섭이 왜 은지화에 그림을 그렸는지 해답은 다들 알 것 같다. 이중섭의 생활고 때문이라고. 가족들을 모두 일본에 보내고, 가족과 헤어진 후 홀로 피란 생활을 이어가던 이중섭의 궁핍했던 생활. 생활은 어렵고, 그림은 그리고 싶고, 그럼에도 사그라들지 않던 그의 열정. 아마, 이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은지화에 자꾸 마음이 갔던 이유. 뭔가가 감성을 끌어당기는 느낌이라니. 전시회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 이중섭은 생활고에 시달렸기에 다방이나 술집, 길바닥이나 쓰레기통에서 담뱃갑을 주워 그 안에 든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그렇다고 그 은박지가 항상 온전했을 리는 없고 구겨지고 찢어져 있는 종이들을 그대로 살려서 그렸던 것. 이 작품들도 사후 1979년에 열린 이중섭 전시회에 엽서화와 함께 함께 대중에게 공개한 것이라고 한다.

<엄마와 아이들> 1950년대 전반



은지화로 만든 영상을 전시회 한쪽에서 계속 비춰주고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환상적이었다.


편지화와 가족


편지화라는 것도 표지화처럼 처음 들어던 단어지만, 내용을 알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마 이번 전시회의 가장 큰 주제는 '가족'이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버림받은 고아가 아니라면, 가족이 모든 사회의 기본 구성요소일 텐데 애틋했다. 전시회를 보다 보니 그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의 한국이름이 이남덕이고, 그녀가 2022년에 세상을 뜬 것으로 나오던데 그런 그녀의 자식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궁금해졌다. 그의 아내가 거의 백 년에 걸쳐 살면서 느낀 세상살이에 대한 소회는 어땠을까? 1952년에 그는 가족과 헤어진 후 1955년 말까지 이중섭은 많은 편지화를 일본에 보냈다고. 화가다웠다. 이 또한 별개가 아니라, 편지에 그림을 그린 것이다. 역시나, 그가 회화와 은지화에 자주 그린 달과 새, 아이들, 물고기와 게 등이 자주 보인다.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54년

편지화라고 해서 별것인가 했더니 역시나 아니다. 그렇다고 가치가 낮아졌을까? 연애편지라고 해야겠지? 결혼을 이미 했지만, 위 작품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왼편에 아내와 아들들을 그리는 화가 남편이 나온다. 참 애틋하면서 다정하게 느껴진다. 아내 머리 위 새는 또 뭘까? 오른편 그림은 가족이 모두 팔걸이를 하고 둘러섰다. 바람이었을 것이다. 가족이 함께 모이길 희망하는 바람. 전시회 설명에 의하면 1954년 11월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다음 해 열릴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가족을 함께 만날 것이란 희망과 기대가 섞인 편지라고 한다. 일본어를 배워둘걸? 편지 내용이 이해가 안 되지만, 아내에게 보낸 편지가 이 정도였다면 그가 생각하는 가족이 어떠했는지 이해가 된다.

<나비와 비둘기> 1950년대 전반

위에 쓴 편지화의 내용이 "아주 잘 그렸어요! 또 잘 그려서 보내주세요. 아빠 중섭"이라고 하니 참으로 자상한 아빠였을 것이다. 아래 그림 <가족과 첫눈>의 제작연도는 1950년대 전반인데, 이 그림에도 여전히 가족, 새, 닭, 물고기가 어우러져있다. 그가 가족을 일본에 보낸 후 그의 작품에서 가족에 대한 그림이 더 많이 등장한다고. 대부분 그림을 보면 온 가족이 한 데 모여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존 작품들과 약간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가족과 첫눈> 1950년대 전반

그건 그림에서 남녀노소로 보이는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더 큰 새와 물고기 사이에서 첫눈을 맞는 장면을 묘사했다. 사람과 새와 물고기의 크기가 서로 비대칭이다. 사람을 더 크게 그려야 할 텐데 이 그림에서는 그렇게 그리지 않았다.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이중섭이 일본에 유학을 했었을 때 인간과 동물이 어우러진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을 많이 그렸다고 하던데, 이런 특징을 나타내는 그림의 하나로 보인다. 새와 물고기를 사람보다 크게 그리다니. 숨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현해탄> 1954년
<아버지와 두 아들> 1950년대 전반

1954년에 그린 현해탄이란 그림을 보면 아이들 그림처럼 천진난만하다. 바다를 건너는 모습이 이렇게 낭만적이라니. 이게 이중섭 심상이라면 과장된 것일까? 밑에 있는 그림 <아버지와 두 아들>을 보면 한참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디가 아버지고 어디가 아들들일까? 아래 그림 <춤추는 가족>은 1950년대에 그린 작품으로 가족들이 서로 팔로 연결한 채 춤을 추는 모습이다. 그런데, 가족이 다 옷을 벗었다. 어떤 뜻일까? 나체라니. 헤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 다시 만날 것이란 희망. 그 이상 해석이 어렵다. 엄마와 아빠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 작은 아이는 둘째라고 생각하게 되고.

<춤추는 가족> 1950년대 전반


회화/ 마지막 풍경


이번 전시회를 시대별로 분류를 할 때 가장 마지막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전시공간에서도 마지막에 배치된 작품들이다. 이중섭은 1955년 이후 대구에서 벌인 개인전 이후 건강 상태가 많이 나빠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에서는 여전히 그가 즐겨 그렸던 소재들이 등장한다. 물고기와 아이들, 새와 손과 관련된 그림. 그런데 상당히 난해하다. 지난 작품들과는 다르게 추상적으로 그려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정릉 집 주변을 그린 풍경화를 보면 나무와 집의 형태가 비교적 뚜렷하게 보이는데, 마지막 풍경으로 구분한 작품들에서는 그의 마지막 생애를 반영한 것.


<손과 새들>과 <물놀이 하는 아이들> 1950년대 전반


<정릉 풍경> 1956년

1956년에 그린 <정릉 풍경>이란 그림을 처음 봤을 때는 이게 뭐지라는 느낌이었다. 이게 이중섭 작품일까 할 정도로 잘 그리지 못한 작품으로 생각이 되었다. 처음에 휙 둘러보고 다시 전시회를 유심히 보게 될 때, 이 작품이 전시회 마지막 쪽에 배치된 것과 제작연도가 1956년이라고 하니 좀 생각이 달라졌다. 왜냐하면 그가 1956년에 죽었기 때문이다. 이게 그의 마지막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년화라고 하니 역시나 그림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이 작품을 평가할 심미안이 없어 생각이 머물지 못하지만, 그림이 어둔 것만은 확실했다. 당시 그의 마음이 이런 상태였을까? 이 작품 설명을 보니 연필로 거칠게 그리고 그 위에 크레파스로 색을 칠했다고 한다. 이게 그의 말년을 표현했다고 하면 크게 틀린 것 같지는 않다.


지금까지 이중섭이란 국민화가를 만난 소회는 어땠을까? 미술에 대해 문외한이다 보니 조심스럽지만, 이중섭처럼 자기의 작품 속에서 가족을 표현한 작가가 얼마나 될까? 더불어 그는 평생 그림을 그린 그림쟁이로 살아왔기에, 그의 말년이 어둡고 음습했더라도 그가 만든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헤맑다. 그의 심성이 그대로 전달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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