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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원한 건 좋은 엄마와 좋은 작가?

루시아 벌린(2020). 내 인생은 열린 책. 웅진 지식하우스

by 길문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었다,라고 쓰면 좋으련만 현실은 냉혹했다. 그녀는 세상에 없으니까. 2004년에 68세의 나이로 죽었다. 30세 이전에 이미 굴곡진 인생을 살았던 여성 작가. 그때 그녀는 벌써 3번의 이혼과 4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남편들은 조각가, 재즈 피아니스트, 마약 중독자였다. 평범한 남자들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삶도 평범하지 않았다. 결코, 평범할 수 없었다. 남편을 잘못 선택해서 그런 것일까? 그런 그녀의 즐거움은 24세부터 쓰기 시작한 소설이 유일한 것은 아닌 듯. 아마, 아이들? 좋은 엄마가 목표였을 수도.



2015년 그녀가 쓴 77편의 단편소설 중에서 43개의 단편이 청소부 매뉴얼(A Manual for Cleaning Women)이란 책에서 알려지면서 문학판에서 신성이 되었다. 단편소설의 천재로 불리게 되었지만, 그때 그녀는 없었다. 벌써 죽었다. 그 후 낙원에서의 저녁(Evening in Paradise, 2018)에 22편이 더 실리면서 그녀의 실체가 명확해졌다. 같은 해 발행된 웰컴 홈(2018) 은 자선 전이지만 읽다 보면 앞선 두 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서전의 내용이나 소설 속 내용이나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자서전이 그녀가 쓴 단편소설집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뭘 의미할까? 소설이 읽다 보면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구분이 애매모호하다. 어느 단편은 또 너무 짧기도 하다. 그래서 숏폼으로 불린다. 그녀가 쓴 단편들 내용이 결코 평범하지 않아서 '더러운 리얼리즘'의 대가인 레이먼드 카버와 비견되기도 한다. 그녀의 글을 읽어보면 오히려 카버보다 더 한 것 같다. 더 하다? 살아온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삶이 그녀를 속인 것 같음에도 글에서는 결코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지 않다. 그냥 그녀는 보여준다.



미국 알래스카에서 태어나 미국 서부의 탄광촌과 칠레에서 10대를 보낸 후 버클리와 뉴멕시코, 멕시코시티를 오가는 삶은 그녀가 죽은 후에야 멈춘다. 1971년부터 1994년까지 버클리와 오클랜드에 살며 고등학교 교사, 전화 교환수, 병동 사무원, 청소부, 간호보조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 네 명의 아들들과 함께 살면서 밤에 글을 썼다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 그녀의 삶에 황금기가 있었을까 의문을 갖다 보면 1994년 이후 콜로라도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6년간이었을 것 같다. 건강도 좋지 않아 평생 선천적 척추옆굽음증으로 고생했으며, 알코올중독을 극복했지만, 암에 걸려 투병하다 2004년에 세상을 떴다.



그녀의 삶이 보이기에 음울하다. 그런데, 그녀가 쓴 단편들도 음울했을까? 그녀의 단편들이 자전적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작품들이 개별적이면서도 어떤 공통적인 느낌을 갖는다. 읽다 보면 어떤 장소들이 겹치는데,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직업들도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내용보다 그녀의 글이 그렇게 암울하고 무겁지 않다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다. 그런 이유는 아마도 그녀가 우리에게 보여준 삶에 우리가 미리 동화된 것은 아닐는지. 그녀가 자기의 삶을 폐허처럼 다뤘다면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리라.



그녀의 글 22편을 소개하는 건 무리인 것 같고, 그중 자의적으로 몇 편 소개해도 그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지 않으리라는 건방짐으로 그녀를 사랑해 봐야겠다. 우선, 〈벚꽃의 계절〉. 제일 처음 나오는 단편이다. 매일 일정한 배달과 경로를 밟는 우체부. 그의 인생이 카산드리아와 그녀의 아들 맷이 매일 겪는 일상과 닮았다. 별로 다르지 않은 하루하루. 뭔가 다를 것 같은 하루를 기대하는 아내 카산드리아의 바람은 남편에게도 향하지만 그 남편도 그 아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던지는 말. "오늘 어떻게 지냈어?" 그럼 하는 말은 "맨날 똑같지 뭐. 당신은?"이다. 뭔가 익숙하지 않은가? 뭔가 특별하고 달랐으면 하는 오늘 하루. 여기에 매번 달랐으면 하는 상대방. 그게 누구든.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으면 당신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오늘 어떻게 지냈어?"


<1956년 텍사스에서의 크리스마스> 타이니가 지붕에 올라간 건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사다리가 있어 그냥 지붕에 올라가서 잭 다니엘을 몇 모금 마시고 그곳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남편 타일러와 가족들은 지붕 밑에서 크리스마스 맞이 파티로 신나게 들떠있고. 타일러와 그의 친구들이 작당을 한다. 계획은 경비행기를 타고 멕시코 빈민촌으로 날아가 산타처럼 장난감과 식량을 떨어뜨리는 것. 그 계획은 성공했는데, 예기치 않은 일어 벌어진다. 산타가 크리스마스에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선물을 낙하했는데 그중 햄 깡통 하나에 맞아 양치기 노인이 죽었다는. 이 믿기지 않는 일이 소설의 줄거리다. 그때까지 타이니는 지붕에 앉아 술 한잔 마시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고요한 밤>을 들었다. 울적한 감정을 달래며 말이다.


〈앨버커키의 레드 스트리트〉. 뉴멕시코주에서 가장 큰 도시. 그 도시에 레드 스트리트란 길거리가 있겠지? 같은 시기 애를 가진 세 명의 여자. 나, 마리아, 마조리. 그런 그녀들의 노력 덕분에 그녀들의 남편들은 군대에 가지 않았다. 그중 마리아가 두 번째 애를 가졌다는 소식에 그녀의 남편 렉스는 마리아를 떠났다. 나는 남편 버니와 헤어지고 윌과 재혼해서 사는데, 뭔가 익숙한 장면들. 그녀의 삶과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은 친구 마리아를 통해서 더 전개된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남편과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술과 담배가 위안이 되고. 여기에 임신과 육아로 힘들어하는 모습들을 작가가 남 얘기하듯 보여준다. 그러면서 하는 말 "마리아를 보면 성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아내의 역할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거나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마도 없었을 것 같았다"(p. 165). 작가 자신 판박이?


<낙원의 저녁> 이 책 원제목과 같다. Evening in Paradise. 낙원에서의 저녁이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런 낙원이 작가에겐 별다르지 않을 뿐. 그래서 하는 말. “사람들은 이따금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때가 무엇 무엇의 시작이었다, 라거나 그때, 또는 그전에, 또는 그 후에 우리는 행복했지,라고 한다. 또는 어떠어떠한 때가 오면, 또는 일단 나에게 무엇 무엇만 있으면, 또는 우리가 어떠어떠하다면 내가 행복할 텐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에르난은 현재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세아노 호텔에 공실이 없었고 그가 고용한 웨이터 세 명 모두 성실히 일했다"(p. 218). 주인공인 호텔 바텐더 '에르난'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다. "그는 앞날을 걱정하거나 과거에 안주하는 유형이 아니었다. 고아 신세로 해변 모래사장을 갈퀴로 고르고 구두를 닦으며 부랑자처럼 살던 자신의 어린 시절은 생각하지 않고, 그의 바에서 껌 파는 아이들을 쫓아냈다" (p. 218).



<내 인생은 열린 책> 국내에서 번역된 책 제목이면서 같은 제목의 단편이다. 주인공 클레어는 아이 넷을 가진 이혼녀. 나이는 서른 정도. 어, 누구 같은가? 작가 분신? 그녀가 코랄레스로 이사한 것은 그녀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결국 그녀는 그곳을 떠난다. 이유는 마을에서 불량 청소년으로 소문난 19살의 마이크 케이시와 사랑을 하면서였다. 원인은 그녀 스스로 제공을 했지만 결과는 이웃집 여자 제니 콜드웰이 그녀의 일상을 관찰하고 소문을 퍼트렸기 때문. 소설은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다. 제니 콜드웰이 보기에 그녀는 문제 많은 여성. 클레어 입장에선 나이와 상관없이 자기 아이들을 사랑하는 젊은 애인과 보낸 즐거운 시간. 그러다 그녀의 아들 조엘이 행방불명되는 소동이 벌어진다. 그로 인해 클레어는 마을을 떠나게 되는데. 결말은 슬프지 않다. 마을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이 흐지부지되고 케이시와 클레어가 도마 위에서 난도질을 당한 후 그들이 벌인 행동은......"케이시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나도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p. 278).



이런 식이다. 루시아 벌린 소설들은. 그녀 개인이 겪은 인생으로 보면 그녀가 쓴 글들이 슬프고 우울하고 비관적이어야 할 것 같은데, 이건 레이먼드 카버를 지칭할 때 쓰는 수사구 '더러운 리얼리즘'을 넘어서는 것 같다. 그걸 넘으면 어디에 위치할까? 그녀의 소설은 말이다. 어쩜, 그녀는 정말 좋은 엄마, 좋은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여자의 일생이라고 평하기는 그렇고, 누구든 삶이 단편처럼 엮이면 이렇게 보일 것 같은, 아니 이럴 것이라고 보여주는 삶 그 자체. 이걸 보여주고 그녀는 떠났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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