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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이상하다?

미셸 투르니에(2014). 방드르디, 야생의 삶. 문학과지성사

by 길문

"원시의 삶 속 자연인을 찾아가는 자연 다큐멘터리 이자 100% 리얼 휴먼스토리."


어디서 들어본 얘기 같다고? 그럼 관심이 있다는 얘긴데, 관심이 있다는 말은 좀 연식이 됐다는 얘기? 모 방송사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의 광고 문구. 일부 논란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방송 중인데, 이게 한국의 중년 남성들에게 먹히고 있다. 자연에 들어가 원시인처럼 자유롭게 산다는 가정. 회사와 가족 등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살고 싶다는 욕망. 구속을 받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인데, 여기 이런 삶을 산 진짜 사나이가 있다.


로빈슨 크루소라고. 무인도에서 물경 28년을 혼자는 아니고 아무튼 살아낸다. 이런! 방송사 제작진들은 이런 인간을 찾았어야 하는데, 그럼 얼마나 이 프로그램을 울 거 먹을 수 있었을까? 방송시간뿐만 아니라 시청률도 엄청 높았겠다. 대박이 될 뻔한 이 프로그램이 현실로는 어렵겠지? 전 세계에 엄청 많은 무인도라도 그 주변 드나드는 배들이 얼마나 많을까? 상상만 해도 즐거운, 실재라면 며칠 하다 지쳐버릴. 무인도에 들어가 깃발 꽂고 여긴 내 땅이야 하고 외치고 싶은 맘이 간절하지만......


생각해 보니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할 것 같다. 우선 스타링크. 일론 머스크가 운영하는 저궤도 위성 서비스가 되어야 한다. 인터넷 연결이 선결조건이다. 다음은 쿠팡로켓배송이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품이 다음 날 눈뜨면 배달이 되어야 한다. 물론, 자장면과 떡볶이도 배달될 거다. 피자도 당연히. 여기에 넷플릭스로 영화를 봐야 한다. 남는 시간 어쩌라고. 이러니 이를 위해 은행 계좌번호가 있어야 한다. 돈이 이체가 돼야 서비스가 지속될 터니. 그 계좌엔 매년 10% 배당주로부터 배당금이 분기별로 들어와야 한다. 무인도에서도 돈이 있어야 하니까. 이는 필연적으로 스마트폰이 필요하다.


뭐가 또 필요할까? 자라는 손톱 때문에 손톱 깎기, 머리는 바리깡으로 빡빡 밀면 되고. 누가 볼 사람도 없는데. 옷이야 수영 팬티 하나 걸치면 될 것 같고. 송월 목욕타월 하나도 필요할 것도 같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더라? 한국 근해는 안될 것 같고. 날씨가 겨울에는 추우니. 아무리, 온난화로 해수면이 1도인가 올라가도. 그러니 카리브해가 좋을 것 같다. 거긴 연중 날씨가 따듯해서 팬티 하나로 버티겠지? 옷이 떨어지면 아마존에서 주문하면 되고. 그땐 페덱스가 빠를까? 심심하면 SNS로 수다 떨고. 인스타그램에 찍은 사진 올리고. 그런데, 이건 근방 싫증 날 것도 같다. 그 사진이 그 사진이 될 듯해서.


언젠가 어디선가 대니엘 디포(1719)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읽은 것 같다. 어릴 때. 쥘 베른(1888)이 쓴 《15 소년 표류기》는 읽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동화책으로 읽었을까? 윌리엄 골딩(1954)이 써서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파리대왕》은 확실히 읽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머릿속은 영화 '캐스트 어웨이(2001)'만 떠오른다. 이건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만든 영화로 톰 행크스가 주인공이었는데 혼자 북 치고 장구 친 영화이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길 바라지만, 그런데 흥미가 진진하지 않았을 무인도 생활이라니. 특히, 밤에 무서워서 어떻게 지냈지?


그래서 《파리대왕》엔 영국소년들이, 《15 소년 표류기》는 15명의 아이들이, 《로빈슨 크루소》에는 프라이데이가, 《방드르디, 야생의 삶》에는 방드르디(Vendredi)가 나오니 무서움은 좀 덜었을 것 같다. 여기에 반려견 '텐'이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방드르디가 피운 담배 때문에 화약이 폭발하고 개는 그때 죽는다. 늙긴 했지만. 그때까지는 방드르디와 반려동물이 있었으니 로빈슨이 덜 무섭고 외로웠을 것 같다. '캐스트 어웨이'에는 윌슨이 있었는데. 주인공 척과 함께. 그럼 척만 무인도에 있었던 거다. 척이 있었으니 유인도지만. 윌슨은 배구공이고.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것이 실화가 빚어낸 결과물인 것 같다. 상상도 생각이니 그 생각이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까? 이쯤에서 기억해야 할 한 인물. '알렉산더 셀커크.' 1676년에서 1721년까지 산 스코틀랜드 실존 인물. 그는 진짜 조난자로 무인도에서 4년을 보냈다고 한다. 이것이 대니얼 디포에 영향을 미치고 아마 쥘 베른까지. 그런 덕에 미셀 투르니에(1977)의 《방드르디, 야생의 삶》도 태어나고. 이건 원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어린이 버전이라는데, 무슨 차이가 있을까? 번역자는 다른 것 같고. 후자는 성인용이라던데? 이건 결국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거꾸로 세운 버전. 당연히 소설로써 《로빈슨 크루소》가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창작이란 게 있기 어려우니.


미셀 투르니에가 프랑스 작가라서 당연히 로빈슨 크루소 말고 프라이데이 이름을 프랑스어로 방드르디로 명명했다. 프랑스인의 자존심인가? 뜻은 영어로 프라이데이. 금요일. 아, 이래서 주인공이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방드르디. 책 제목도 그렇고. 그런 그는 화이트헤드호를 타고 영국으로 떠나고. 버지니아호를 타고 난파된 로빈슨 크루소는 섬에 그대로 남는다. 신은 자비로워서 무인도에 혼자 살는 게 힘든 그에게 사랑을 베푼다. 다시, 인간을 한 명 보내는데 그는 에스토니아 출신 어린 선원 디망슈(Dimanche)다. 디망수? 프랑스어로 일요일이라니. 로빈슨 크루소가 자애롭게 느껴져 몰래 배를 빠져나왔다는데, 방드르디는 몰래 섬을 빠져나와 배를 타고 떠나는 상황은 뭐지? 이 은유는?


방드르디는 야생을 떠나 문명의 세계로 떠났으니, 남은 자 로빈슨 크루소의 남은 인생이 행복했을까? 그전에 미셸 투르니에가 후속작을 썼으면 어땠을까? 예를 들어 '방드르디, 문명의 삶'이라고. 방드르디 또한 문명세계로 나갔을 테 혹시나 로빈슨 크루소 같은 절망감은 없었겠지? 아무튼,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다들 돌아간다. 자기들 나라로. 미셸 투르니에의 로빈슨 크루소만 빼고. 《파리대왕》에선 누군가 죽었지만. 그러고 보니 영화 '캐스트 어웨이'가 가장 슬프다. 주인공이 천신만고 끝에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갔더니 여자친구는 이미 결혼하고. 겨우 살아서 돌아갔는데, 어쩌면 버틴 이유가 그녀 일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미셀 투르니에는 주인공을 바꾸면서까지 말하는 게 뭐였을까? 굳이 주인공을 방드르디로 내세운 까닭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처럼 무슨 깊은 사연이? 제목을 '로빈슨 크루소, 야생의 삶'이라고 했어야 맞는 게 아닐까? 제목을 《방드르드, 야생의 삶》이라고 해놓고 정작 방드르드는 로빈슨 크루소와 반대로 자연이 아닌 문명을 선택하게 만들고. 그래서 제목이 이상한 거다. 문명인이었던 크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니, 방드르디를 비꼰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지만.


작가가 소설 제목을 방드르디로 내세운 건 전적으로 작가의 의지지만. 어떠랴, 작가의 의도는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으니. 그러니 소설은 방드르디가 출현한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난파한 배에서 살아남은 크루소가 섬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외롭고 힘든 생활을 이겨내려고 그가 살아왔던 세계를 재현한다. 그곳에서 법을 만들고 남은 시간을 관리한다. 그래봤자 바닷물에 물 붓기지만. 표가 나지 않으니. 기존의 세상과 체계를 구축해 봤자 무인도 아니던가. 자연으로 팽개쳐진 홀로 남은 문명인이 할 거라곤 자기가 배운 세계를 재현하는 것밖에 없었겠지만.


그런 그곳에 방드르디가 나타난다. 불타는 금요일이 시작된 것이다. 뜨겁고 신나는 유인도를 만들기 위해서. 원작은 로빈슨 크루소가 그를 구한 게 날짜 프라이데이라서 프라이데이라고 이름을 지었지만. 여기서도 생각해 보면 방드르디란 이름 또한 문명의 상징이다. 무인도에서 금요일이라니. 날짜를 계산하다가 정신이 나갈 것도 같은 무인도에서 말이다. 그런 무인도에서도 홀로 살아남는 게 어려우니. 다행인 건 야생의 삶이 혼자의 삶은 아니듯이. 거기도 나름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가 있었을 것. 이걸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는지. 대게 좋은 소설이란 게 시니피앙(기표)이 주는 시니피에(기의)를 헷갈리게 만들던데. 무척 헷갈릴수록 더 좋은 소설이라는 풍문도 있지만.


여기서 내용의 반전을 위해 작가가 사용한 건 폭발이었다. 동굴 안 숨겨놓은 화약의 폭발. 그것도 방드르디에 의해서 말이다. 그가 핀 담배 불로 인해 한순간 기성 질서가 훅 날아간 것이다. 그로 인해 문명이 한순간 사라진 것이다. 세상이 전도된 것이다. 그 후 노예 방드르디와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의 관계가 무너진다.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인과 노예가 바뀌는 관계. 그런데 방드르디는 배를 타는 선택을 한다. 호기심 때문에? 정작, 로빈슨 크루소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게 의미하는 바는? 이걸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제목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럼, 야생에서 자유롭게 살아라는 의미? 당신의 생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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