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이 없는 국수? 고명이 없는 국수를 먹어본 적이 있을까? 하물며 신 김치라도 얹어서 먹으면 웬만한 고명보다 좋지만, 국수에 고명이 없다니? 김숨의 소설들이 그런 것 같다. 누구든 별다를까? 대중목욕탕에 가면 느끼는 그 기분. 벗은 알몸은 다 같은데, 겉에 어떤 옷을 걸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그런데 정말 달라지던가? 고명 없는 국수를 먹는 거야 그렇다 쳐도 그 국수를 직접 만든다면. 요즘이야 다 사 먹는 국수. 그게 소면이던 중면이던. 고명 없는 국수를 먹으라니.
국수는 맛있게 우려낸 멸치 국물이 핵심이겠지만, 내겐 고명이 더 결정적이다. 고명이 없는 국수. 이걸 자꾸만 먹으라는 작가가 있다. 이게 우리 모습이라고. 화장 없는 얼굴을 자꾸만 바라보라고. 화장해도 그 얼굴이 그 얼굴이라는. 그 불편함을 알려주는 작가가 있다. 그런 그녀가 '국수'라는 소설집을 냈다. 아주 오래전에. 물론, 국수를 직접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수고를 들였겠지만 그렇게 만든 소설을 읽는 심사는 편치 않다. 아니, 이게 현실이라고 주장하지 않지만 글로 보여주는데 편할 수 있을까?
〈국수〉라는 제목 때문에 처음 든 생각은 김애란의 소설 '칼자국'이었다. 작가의 어머니는 국숫집을 하면서 그녀 자식들을 키웠는데, 덤으로 남편까지. 그건 직접 겪은 그녀 집안 이야기였지만, 국수는 글쎄다. 유산으로 힘들어할 때 의붓어머니가 해준 국수를 먹지 않고 버리는 그 심사. 입덧 때문이 아니다. 의붓어머니가 아니라면 버렸을까? 그녀 의붓어머니는 아예 애를 갖지 못했는데. 후에 그런 그녀를 위해 국수를 만드는 그녀라니. 이건 뻣뻣한 국수 면발이 익혀져 국수가 되듯, 삶이 그녀를 의붓어머니를 받아들이도록 반죽한 것일까? 가족은 이렇게 국수 면발처럼 익으면 부드러워지는 걸까? 아니, 삶은.
마흔셋에 후처로 들어온 그녀가 처음으로 만든 음식이 국수였다. 열네 살 맏딸은 그녀를 받아들였을까?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그녀가 만든 국수를 뚝뚝 끊었겠지. 먹지 않고. 그런 그녀도 이제 마흔셋. 엄마로 받아들이지 않은 후처는 일흔두 살. 후처로 살아가는 세상도 힘들었을 텐데, 설암이라니. 병원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받은 검사 당일. 두 모녀가 병원을 나와 찾은 곳이 국숫집이었다. 검사를 위해 전날부터 빈 위장을 위해 선택한 음식이 국수. 문을 연 곳이 그곳뿐이었지만. 세월이 그녀를 엄마로 받아들인 걸까? 소설가 김숨은...
이런 식이다. 일상 속 인간관계에서 오는, 여기서는 가족이지만, 불편함은 이미 편혜영의 소설들로 인해 면역이 된 줄 알았다. 아니었다. 여전히 남은 우리네 삶의 부스러기들이 고갈될 리가 없을 것이다. 그건 삶이 나에게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에. 죽는 순간까지. 지구상 인구수만큼 공평하게 존재하기에 이걸 천착해 만든다면 그 다양성은 넓고 또한 깊을 터. 이래서 소설가란 직업이 없어지지 않겠지만, 다행인 건 이걸 느낀다고 우리가 죽지는 않는다는 것. 소설 읽고 자살할 수는 있겠지만, 소설이 주는 고통, 상실, 슬픔, 후회로 인해 누군가는 한 뼘 클 것 같고. 정신적으로 말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정말 우리는 소설을 왜 읽지? 그것도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 소설들을? 〈옥천 가는 길〉을 읽다 보면 정말 우리네 일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본 것 같다. 옥천. 어머니의 고향. 그곳에서 장례가 치러진다. 보통 어머니 장례는 대게 아버지의 고향에서 치러지지 않나? 아버지의 고향이 옥천일 수도 있겠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차 안에서의 대화란 게 현미경 들여다보듯 세밀해서, 이런 대화를 어떻게 재현할까? 그나저나 자매는 오늘 안에 옥천에 도착할까?
〈그 밤의 경숙〉. 어디서 본 듯한 풍경. 그건 편혜영의 단편 〈산책〉과 플롯이 유사한 듯 다르다. 역시나 읽는 이를 불안하게 만드는 묘사라니. 〈산책〉에서의 산책이 그냥 산책이 아니 듯 〈그 밤의 경숙〉또한 집에 돌아가 편안히 쉴 수 있을까? 돌아가는 차 조수석에 탄 아내. 그 차는 퀵서비스 오토바이를 치고. 운전자를 치기까지 오토바이 운전자와 벌이는 실랑이. 이걸 지켜보는 아내와 아이들. 한 번쯤 운전자라면 겪었을 말다툼이 보복운전을 넘어 우연으로 운전자까지 쳤는데, 결과는?
〈막차〉. 막차 고속버스에 탄 순옥과 남편, 그리고 사내 둘. 여기에 운전사까지. 이건 호러물도 아니고. 읽다 보면 순간 오싹해지기도 하고. 순옥이 피해망상증 환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정말 그녀 남편은 버스에 같이 탄 걸까? 그러고 보니 이 소설도 〈그 밤의 경숙〉처럼 부부가 주인공이다. 아이들이 없는 것만 다르고. 그들 부부는 늦은 밤 막차 타고 왜 가는 걸까? 며느리 장례식에 가는 부부 심정이란 게 이럴 것도 같다. 먼저 뜬 며느리라니. 〈명당을 찾아서〉는 명당을 찾아서 가는 길이 황천길이 아닐까 마음을 쪼이면서 읽었다. 부동산 중개업자에 납치돼서 죽게 되는 스릴러 소설. 명당이 배 타고 섬에까지 들어간다는 설정이 작위적이라도 가는 내내 졸게 하다니. 이런 이런.
부부간의 갈등은 며느리와 시아버지까지 확장된다. 이게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이다. 섬뜩하다. 남편은 밖에서 바람피우는 걸까? 입덧 심한 며느리 집에서 오리뼈를 줄곧 삶아대는 시아버지라는 설정. 여기에 시아버지는 202호 여자에게 왜 돈 30만 원 빌려준 걸까? 이걸 묻지 마시라. 소설 내용이 불편하니 작가의 의도에 걸려든 것이지만 역시나 결론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을 밤이란 것. 구제역 때문에 죽게 되는 그 많은 돼지들은 무슨 죄가 있을까? 그걸 묻기 위해 흙을 파는 포클레인 기사는 또 무슨 죄? 이게 〈구덩이〉다. 순번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대기자들〉이나 가난한 이들에겐 겨울밤이 결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될 수 없음 또한 익히 알고 있지만.
여기까지가 고명 없는 국수 맛이다. 소설가의 한계 말이다. 다행인 건 내가 만드는 국수는 고명을 내 맘대로 만들 수 있듯이 인생이란 게 그런 것 아닐까. 멸치 국물까지는 어쩔 수 없더라도, 고명만은 말이다. 고명만은 내가 원하는 데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고명에 따라 진짜 우리네 인생이 좀 달라질 것 같지만, 이게 슬픈 거지만, 이것만이라도 대단한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