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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어깨 위에서 무엇을 봤을까?

대런 아세모글루 & 사이먼 존슨(2023). 권력과 진보. 생각의힘

by 길문

'거인의 어깨'위에서 세상을 보면 어떨까? 당연히 더 멀리 보았을 것이다. 더 멀리? 그게 천 년이다. 그 정도의 역사를 훑으니 인간이 테크놀로지를 통해 무엇을 이뤘는지 알 수 있다. '거인의 어깨.' 아이작 뉴턴이 1676년 로버트 훅에게 보낸 편지에 씌어있던 문장이라는데, 이 말의 기원은 뉴턴이 아니라 1130년 베르나르 사르트르가 6세기경 쓰인 프리스키아누스의 저서에서 찾아낸 것이라고 한다. 결국 '거인의 어깨'란 인간이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인데,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인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보았을까?


이런 해답을 위해 이들은 20년간 자료를 모으고 토론하고 분석해서 책을 냈다. 이들이 진짜 거인인 듯해서 그저 이들 '어깨'에 올라타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알아듣는 척했다. 마음이 좀 우쭐하다. 테크- 진보(progress)가 인류를 위해 기여했음을 배웠으니 말이다. 얼핏 간단해 보이는 결론인데 책 두께가 두껍다. 두껍다? 그럼 이들이 엄청 노력했다는 것인데, 궁금했다. 얼마나 노력했을까? 20년 동안 이 책을 쓰지 않았지만, 방대한 자료를 모았을 테니 출처 및 참고문헌을 펼쳐봤다. 서양학자들의 엄밀성이야 그러려니 했는데, 페이지가 무려 117페이지였다. 어라? 웬만한 논문 수준? 책 본문은 총 597페이지인데 말이다. 경탄스럽다. 이들의 꼼꼼함이란. 이러니 이들이야말로 석학인 것이다.


책은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진보란 무엇인가 물으면서. 진보(progress)? 이 단어 때문에 헷갈렸다. 보수의 반대말이 진보였던가? 테크는 발달한다가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그렇지. 테크는 꾸준히 나아간다. 테크는 퇴보하지 않는다. 진보라는 단어가 더 상징적이다. 그런데 권력(power)이라? 이들이 테크 못지않게 권력에 관심을 갖는 건은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테크는 진보한다는 명제 안에서 그럼 테크-방향은 누가 결정하는가, 테크-진보로 얻어진 과실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아니라면 구체적인 대안은 어떻게 할까. 이것이 이들이 책을 쓴 목적으로 이해했다.


테크는 속도도 중요하지만 '방향'이 더 중요한데 이 방향을 누가, 어떻게 결정할까 때문에 이들이 권력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책 제목이 권력과 진보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권력? 여기선 사회적 권력이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강압 권력이 아닌 것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비전을 제시하는 것도 권력이기에, 사회에서 누가 어떻게 비전을 제시하는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테크 방향이 결정되고 테크-진보로 인한 과실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배분하면 될 터이니까. 이와 같은 사회적 권력 중 하나인 설득 권력이 가장 중요한데, 이를 위해 아이디어의 힘과 의제설정의 힘이 작동된다고 한다. 그럼 누가 이를 더 활용할 수 있을까?


중세 시대 수차와 풍차를 이용한 방앗간이 노동자 1인당 산출량을 20배나 높여주었음에도, 늘어난 잉여는 대부분 지배계급에 돌아갔다. 그러니 농민들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 테크놀로지 진보가 준 성과가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은 것인데, 엄격한 신분제 사회라는 제한에도 이렇게 된 것은 사제와 교단이 노동은 노동자의 몫이라는 생각을 전파시켰기 때문이다. 이러니 농민들은 테크-진보의 방향을 그들로 향할 수 없었다. 강압과 설득을 구사할 수 있는 지배 권력에 의해 경제적인 '잉여'가 불평등하게 분배된 것이다. 테크가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사회적인 편향성을 띠는 것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비전과 이해를 테크놀로지에 관철시키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날 디지털 테크-진보가 사회 전체를 위한 번영을 가져왔을까? 미국의 경우 소득 상위 1% 계층이 미국민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50년대 이후 9% 선이었다가 2006년에는 20.02%로 높아졌다. 지금까지 그렇다. 미국 대공황 직전엔 21.09%라고 하니 엄청 높다. 이런 배경엔 1980년 이후 신자유주의 때문이다. 여기서 테크-진보 관점으로 돌리면 20세기 미국 5개의 독점기업(GE, AT&T 등)의 시가총액이 전체 GDP의 10%를 넘지 않았는데, 현재 구글, 아마존, 애플 등 미국 빅-테크 5개 기업의 시가총액이 전체 GDP의 20%를 넘어섰다. 애플 시가총액은 3조 달러로 인도 GDP와 비슷하다. 디지털-테크가 역시나 번영을 가져오는 건 확실하다. 그럼 과실은 누구에게 많이 갔을까?


예를 들어, 1980년대 GM은 74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했었는데, 2022년 구글은 19만 명을 고용했다. 이런 일이 왜 벌어졌을까? 디지털 테크-진보가 노동자에게 번영을 가져오지 않은 건 테크놀로지 방향이 자동화로 맞춰졌기 때문이다. 그럼 그게 가능할까? 모두를 위한 번영의 시대 말이다. 실제 그런 시기가 있었는데, 그게 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까지라고 한다. 이때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매년 3% 정도 올랐다. 이는 제조업, 통신 등 대부분의 산업에서 성장이 이뤄져 보다 나은 일자리가 모든 노동자에게 고르게 제공되었던 시기라고 한다. 여긴 테크-진보 외에 노동운동이 강화되고, 강화된 노조가 기존 권력에 반하는 길항 권력으로 작동해서 테크-진보로 인한 번영을 모두가 누렸다는 것이다.


그럼 테크-진보가 바람직하다는 논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를 위해 이들은 '생산성 밴드왜건' 개념을 제안한다. '기업의 생산성이 좋아지면, 기업은 생산량을 더 늘릴 것이고, 그러면 더 많은 노동자가 필요하고, 이로 인해 고용 경쟁이 벌어지면 임금을 끌어올려, 결국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라는 것인데, 이렇게 작동이 되지 않은 것이다. 이들이 의문을 갖는 지점이다. 테크-진보로 얻어진 번영이 일부 빅 테크 기업의 경영진이나, 그들 기업 주주들에게만 돌아갔다는 것.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들은 주장한다. 기업이 테크-진보를 받아들여 활용하는 것은 평균 생산성을 위해서라고. 기업이 한 명의 노동자를 추가로 고용했을 때 늘어나는 산출량이 한계생산성인데, 기업은 이를 위해 테크-진보를 활용하지 않는다. 노동자의 고용을 높이지 않아도 전체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인 자동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자동화로 평균 생산성을 높이고 평균 실질임금을 감소시키는 방향. 이들이 취한 방향인 것이다.


이렇게 테크-진보가 자동화로 맞춰지게 된 배경에는 기업의 사회적 역할이란 내러티브가 바뀌었던 것도 한몫을 차지한다. 배경엔 기업의 존립 목적이 이윤을 남겨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야말로 기업이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는 설득 권력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엔 밀턴 프리드먼, 조지 스티글러 등 뛰어난 경제학자들이 의제설정을 주도했으며, 더해서 빅 테크 기업가들이 디지테크-진보가 우리 모두에게 더 좋은 삶을 줄 것이란 비전을 설파했기 때문이다. 구글, 오픈 AI, 메타 등 인공지능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기업가들이 인공지능이 궁극적으로 우리 생활을 윤택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비전이 사람들과 정책, 나아가 구체적인 제도에 영향을 주어 테크-진보가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의제를 만들어 설득을 해왔다고 한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까? 어떻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을까?


테크는 분명히 진보한다. 문제는 그것이 가져오는 번영이 모두에게 고르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테크놀로지의 경로를 다시 잡자(11장).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제프 베이조스 등으로 대표되는 빅-테크 기업들과 이들이 풀어놓은 테크노-낙관주의를 넘자고. 이를 위해 다시 경로를 다시 맞추자고 이들은 주장한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테크-유토피아, 테크-진보가 모두에게 혜택을 주지 않으니 테크놀로지가 번영을 위해 진보하도록 테크-진보에 대한 내러티브와 규범을 새로 만들고, 테크-유토피아가 아닌 테크-현실주의를 통해 노동자와 시민이 만들어내는 길항 권력에 기반해서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고, 현실적인 제도를 만들어가자고. 보다 구체적으로 시장에서 인센티브를 제시해서 테크가 가져다준 과실을 공정하게 분배하거나, 거대한 빅-테크 기업을 분할해서 힘을 줄이거나, 세재를 개편해서 테크-진보로 얻어지는 혜택을 고르게 누리게 하자고.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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