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또한 태고의 생존본능이 복잡하게 꼬인 인간의 유전자 어딘가에 (인간의 사랑이) 여전히 바람직하지 못한 행태로 남아 있다는 가르침을 주었다"(p.448).
보다 말았다. 책을 읽고 마음이 푹 빠져 혹시나 같은 감정일까 부지런히 유튜브 찾았다. 그래서 보다 바로 빠져나왔다. 영상이 결코 상상을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떤 상상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기서 상상은 무한대이고 영상은 제작을 해야 하니 한계가 많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영상과 상상의 대결. 여기서 상상은 말 그대로 이야기(story)를 말한다. 이야기의 '힘'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걸 확장하면 이야기가 전부인 소설은 힘이 '세다'가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소설이 항상 영상을 이기는 건 아니겠지만, 영상이 영화를 말한다고 해도 중요한 건 이기고 말고 할 게 아니지만 말이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도 하는데, 반대로 이미 만들어진 영화를 소설로 쓰는 경우가 있을까? 상상 그 힘! 바로 유튜브에서 같은 제목의 영화를 보다 나온 이유는 소설이 준 그 감흥을 영화가 다 날릴 것 같았다. 소설 주인공 카야. 본명 캐서린 대니엘 클라크. 일명 마시 걸(marshy girl)에 대한 이야기. 이 글을 쓴 작가 델리아 오언스는 23년 동안 생물학을 연구한 학자이다. 직업이 소설가가 아니었다. 우선, 이게 눈길을 단박에 끌었다. 학자가 쓴 소설이라니. 그전에 델리아는 7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야생동물을 관찰하고 그 연구 결과를 칼라하리의 절규(Cry of Kalahari, 2022)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세계적인?
이래서 의문이 풀렸다. 그녀는 이미 필력을 인정받은 작가였다. 학자가 작가로 변신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학자가 쓰는 논문 형태의 글과 소설가가 쓰는 소설 형식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의문은 당연히 어떻게 학자가 소설까지 썼고, 그것도 논픽션과 픽션으로 유명해질 수 있을까? 아마, 《향모를 땋으며, 2020》을 쓴 로빈 월 키머러가 소설을 쓴다면 이런 소설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까지 해봤다. 상상은 자유로와 저 멀리 우주까지 마음대로 날아갈 수 있으니. 한 가지 더 하자면 작가가 이 소설을 마친 시기가 예순아홉이라고 하니 그냥 상상도 스토리만큼 힘이 세다.
살아오면서 그녀 내면에 깊숙이 간직한 외로움이 그녀를 끌어올려 이 소설을 쓰게 한 건 아니었을까? 이건 전적으로 그녀가 말했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 이 책은 외로움에 대한 책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러나 아니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느껴진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말. 외로우세요? 그럼 이 책 한 번 읽어보세요,라고 강력히 추천할 수 있다. 작가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그럴 수밖에 없는 내용. 카라는 나이 여섯에 혼자가 된다. 아빠와 엄마가 낳은 자식 네 명. 이렇게 여섯 가족이 오손도손 행복하게 사는 가정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면 애들과 마누라를 패대는 개망나니이다. 여기에 도박까지. 그러니 마누라도 집을 나가고 애들도 키 순서대로 집을 나간다. 아버지가 그렇게 된 이유를 완전히 알 수 없어도, 엄마와 오빠와 언니까지 집을 다 나가버린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건 아버지 때문이지만 그런 아버지마저 집을 나간다면 어린 카라는? 마지막까지 의지하며 늪지에서 어떻게 술 취한 아버지를 피할지 알려주던 막내 오빠 애디마저 집을 나갔을 때 남겨진 카라. 잠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던 아버지마저 마지막으로 집을 나갔을 때 그녀는 필경 버려졌다고 느꼈을 것이다.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소설 배경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해안 습지이다. 습지! 군데군데 연못과 끝없이 펼쳐진 풀숲으로 이뤄진 그곳엔 게와 사슴, 갈매기, 조개, 물고기, 야생 조류가 살아 꿈틀대는 공간이다. 그곳 습지 생물들은 세금과 법을 피해 그곳으로 도망친 사람들만 빼면, 조화롭게 공존하며 살아가는 생명의 땅이다. 그곳에 어린아이 혼자 버려진 채 살지만 습지와 그곳 생물들은 그녀 곁에 머물며 친구가 되어 주었다. 엄마와 가족이 그리워 지치고 지쳐 눈물마저 마른 그녀 마음속엔 언제나 함께하고 배신하지 않은 친구 '자연'과 '습지'가 곁에 있었다.
그렇게 카라는 홍합을 따고 물고기를 잡으며 혼자 살아가니 어느덧 시간이 17년이 흘렀다. 그 아득한 시간 속엔. 그녀를 어릴 때부터 지켜보고 도와주며 사랑을 알게 해 줬던 테이트도 있었고, 오로지 수컷으로 욕정을 불태우던 체이스도 등장하면서 연애소설처럼 전개되지만. 어느 날 지역 대표 바람둥이 체이스가 죽음으로 발견되면서 소설은 성장소설과 연애소설을 벗어나게 된다. 카라가 유력한 용의자가 되면서 법정 드라마와 스릴러를 표방하지만 이건 권투 할 때 잽(jab)의 잽도 안된다. 이 소설이 주는 감동에 비하면 말이다. 그녀가 혐의를 간절히 벗어나길 기원하면서 읽게 되는데, 독자가 바라던 대로 혐의를 벗지만. 이렇게 끝나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역시, 아니었다.
체이스 이전에 이미 커다랗게 자리 잡은, 그렇지만 커다란 상처를 남겼던 테이트와의 행복한 결말만 남은 줄 알았다. 오랫동안 죄책과 후회로 멍들었던 테이트가 결국 카라의 마음을 열고 후회 없이 사는 것으로 끝냈으면 좋으련만. 두 사람이 뿜뿜 뿜어낸 행복을 신이 질투를 했는지 어느 날 예순여섯이란 나이로 그녀는 더 이상 세상이 주는 외로움을 벗어난다. 남겨진 테이트. 이를 감내하는데. 그러면 그는 카라가 느꼈을 배반과 불신에 대한 상처를 조금이나마 알았을까? 책을 읽다 갑작스레 불안해진 마음으로 궁금해서 남은 분량을 마저 읽다 보면 거기엔 마지막 반전이 있었다. 그건 그녀가 범인이었다는.
유튜브로 소설이 준 감동을 연장시켜 보려다 바로 그만둔 이유. 그건 책을 읽는 내내 내 안에 자리 잡았던 외로움을 온전히 간직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영상이 오히려 방해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