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정지아(2022). 아버지의 해방일지. 창비.

by 길문

딱 이 느낌이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다르게 표현하면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소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것이 뉴스라면 그저 웃어넘길 텐데. 그게 말이다.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죽었다면 참 "긍게 사람이제"란 말이 나왔을까? 다시 생각해 보면, 어느 동물이 이렇게 죽을까? 거의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는데, 생각해 보니 '긍게 사람이제'란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사람이니까 이렇게 죽지.


아니다. 이렇게라도 죽나? 이렇게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왜에 대한 답이 명확히 없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책을 잘못 읽었나? 아버지 고상욱은 왜 이렇게 죽었어야 할까? 읽다 보면 그 이유를 밝히는 책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아버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한때 우리가 이랬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랬을 것 같다는 막연한 추측. 이건 엄연한 현대사였는데 말이다. 그만큼 시간이 지나갔다. 그렇다고 차 한잔하면서 지난날 곱씹는 맛으로 읽을 책도 아니다. 마음이 아리기 때문이다. 왜? 등장인물들이 이념보다 따듯하다. 그러고 보니 이념이 온기를 갖던가? 따듯하니 '긍게 사램이제'가 맞는 것 같다. 역시나!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보면 이런저런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흘려본다. 크게 별다를 것 같지 않아 보여도 내려서 다가가면 많은 사연들이 분명하게 드러날 텐데, 이 소설이 그런 소설이다. 엄연한 사실. 이제 우린 어떤 사실들이 역사 속에서나 각인되어 있음을 확인하겠지만, 가해자가 누구였 건 피해자가 누구였 건 그들 대부분 세상에 없지만. 비극이 그렇듯이 가해자가 자기 가해를 기록을 할까? 이러면 이것이야말로 코미디. 가해자는 말이 없고, 피해자는 억울하니 말이라도 남겨야 구천을 떠돌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한테 피해를 받거나 입혔던 것일까?


'봄날 오후 과부 셋(2009).' 정지아의 책을 다 읽지 않았어도 이 단편만큼은 뇌리에 확 박혀있다. 그만큼 강렬했었다. 뭔가 산다는 것을 다 아는 듯한 문장들 때문이었다. 그런 작가가 '아버지의 행방일지'로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이번엔 아버지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한때 혁명을 꿈꾸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강렬히 믿던 아버지가 어느 날 죽었다. 이로 인해 해결되지 않을, 살았어도 해결되지 않을 일들을 남겼다. 우선, 딸이다. 딸인 '나'는 아버지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세상을 바꾼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바뀌었는데 아직도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버지가 뒤처진 사람 같지만, 딸이 어디서 나왔던가. 아버지다. 장례식 후 딸은 아버지가 그렇게 원했던 죽어서라도 아버지가 강렬히 바라던 방식대로 아버지를 저세상으로 보낸다.


연좌제. 빨갱이. 이 단어만으로도 누군가 목숨줄을 쥐락펴락하던 시절. 그 시대가 아득하지만 이로 인해 누군가 받았을 피해. 이걸 어떻게 해석할까? 유독, 작은 아버지만이 끝까지 집안을 말아먹은 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죽었으니 화해를 하게 되는 게 그나마 다행일까? 죽었는데 어찌할까? 이걸 화해라고 해야 할까? 어쩔 수 없음. 그냥, 받아들임. 그저 망자라도 고이 보내는 것이 산자의 도리라고 우리는 믿으니까 말이다. 이러고 보면, 먼저 죽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왜냐면, 난제는 남은 자들의 몫으로 남겨지니. 딸도 그렇고 동생도 그렇고 피를 나눴으니, 남은 자의 운명은 대게가 이렇다. 죽은 자가 남겨진 숙제를 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한때 정치적 다름이 결코 절대적이지 않음을 이 소설 속 인물들이 웅변한다고 해도, 그건 이해관계가 없었을 때가 가능했던 것 아닐까? 한때 빨치산들이 모여 다음 혁명을 위해 위장 전향을 한 아버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 살아남은, 소용돌이치는 역사를 견뎌온 혁명가들은 드러나지 않은 오해를 품고 아버지를 배웅하러 장례식 장에 모여든다. 남은 자들이 의례 말이 많은 거지만 남아 있는 날들이라도 무료해서 말이라도 많겠지만, 그들 뜻대로 바뀌지 않은 세상을 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이때 말은 힘이 빠진 넋두리, 실현 가능하지 않은 열정이 주는 공허도 난감하긴 매한가지일 것이다.


빨치산이란 단어를 언제 들어봤던가? 아마, 영화 남부군(1990) 때문에? 그전일 것이다. 한참 전. 영화 내용이 무거웠었다. 근현대사가 주는 질곡, 이 단어가 주는 어려움만큼이나 그때 삶이 그랬을 텐데, 책을 읽는 내내 영화가 주는 비장함은 없었다. 찬찬히 뜯어보면 살아남은 사람들, 그들 삶이 결코 밝을 수 없음에도 한명의 남자이면서 아버지가 겪은 삶이 결코 어둡지 않은 것은 오로지 작가의 역량임 때문이라면 그야말로 부연이다. 그래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웃을 수만 없는 우리네 삶이긴 한데, 그렇다고 소설 속 인물들이 맞이하는 세상과 그들의 처세란 것을 마냥 울면서 읽을 수도 없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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