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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Jan 06. 2024

사람은 한 번 죽는다.

팀과 라미. 드라이빙 미스 노마(2018). 흐름출판.

사람은 한 번 죽는다. 이건 참인 명제이다. 두 번 죽는다면 행복할까? 죽는 것이 행복하다면 두 번 이상이라도 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난 죽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죽으면 이 글을 쓸 수 없으니 이것도 참인 명제가 될 것 같다. 난 살아 있다.


"세상에는 정말 멋진 일이 많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전부 계획 없이 찾아와요."


이건 잘 모르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멋진 일이 정말 많다는 것도 사람 나름일 것 같다. 그런 멋진 일들이 전부 계획 없이 찾아오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직, 살 날이 많이 남았으니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동의하고 싶을 정도로 내 남은 시간이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충만했으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이건 희망 사항이고, 사람마다 당연히 다를 텐데, 적어도 노마 할머니에겐 맞는 말일 것 같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겪은 마지막 화룡점정. 1년 사이에 이런 기억들을 가져볼 수 있다니. 책으로 아름답게 기록되었지만, 기록되지 않았더라도 돌아가시기 전 멋지게 최후를 맞이한 것 같아 부럽기도 하다. 누구나 노마 할머니처럼 세상을 등질 수 없으니.


골골 100세. 골골 거리며 100세까지 살면 뭐 할까?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니 사는 것이 좋은 것 같은데, 병마와 싸우며 병실에서 죽을 날을 아니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끔찍할 것 같다. 그래서인가? 어떻게 끝맺는 것이 누구든 시작하고 살아가는 과정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마침표 말이다. 마침표가 없으면 문장은 끝날 수 없듯이. 당신이 누구든 마침표를 찍거나 찍히니까 말이다.


어느 날 대학병원 병실을 늦은 시간에 지나다 본 장면 하나. 누군가 병실에서 병상에 눕지 못하고 엎드려 있던 환자. 그때 얼핏 들은 말로는 말기 암 환자라고 했었다. 암으로 인한 고통으로 눕지도 못하던 모습! 사실, 새삼스러운 모습이 아니다. 대게 우리들도 그렇게 세상을 뜰 것 같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서. 아마, 노마 할머니도 고통 속에서 세상을 등졌을 것 같은데 책 내용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고? 이 책은 말기 암 환자나 임종을 앞둔 환자들을 위한 기록이 아니기에.


글을 쓴 팀과 라미도 책 속에서 언급을 한다. 책 행간에 간혹 드러나는 떠나는 자와 떠나보내는 자의 간극. 그 간극은 엄청나지만, 그건 그들이 흘렸을 눈물로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하나 더 이 책의 목적은 말기 암 환자들 돌보는 가족들의 애환을 담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노마 할머니와 그녀를 돌보는 팀과 라미가 겪었을 불편함과 고통을 기술했다면 이 책은 전혀 독자들한테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고? 사람은 어차피 누구든 세상을 떠나는데, 그 마지막을 쉽게 넘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쩜 이건 당연한 것도 같다. 죽는 것이 쉽다면 우리가 그렇게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렇게 애타고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고 싶겠는가? 쉽게 가면 그런가 보다 하고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도 쉽게 살 것 같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달력 속 날짜가 하나씩 지워져 갈 때마다 어머니의 수면 시간은 더욱 길어졌다"(p.289). 책을 읽다 이 문장에서 잠시 멈췄다. 아니,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그렇다. 같은 시간을 살지만 그게 세상에서 조만간 아스라이 사라질 사람의 시간은 분명 달라질 것 같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들 떠나지 않던가. 누군가 주머니에 들어있는 각자의 남은 달력은 다 다를 테지만, 그게 하나씩 지워질 때마다 누구든 마지막으로 갈수록 수면 시간은 똑같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들 끝맺을 테니까, 보통은.


말기 암 환자. 돌아가신 건 심부전으로 돌아가셨다. 울혈성 심부전. 결국 어떤 암이건 암으로 인해 장기가 망가져 사망을 하니까 암으로 인한 사망일 텐데, 마음이 불편해도 너무 불편했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말기 암 진단을 받은 한 할머니가 있다. 여생이 얼만 남지 않았는데, 얼마 남았는지 모르지만 자식과 여행을 떠난다. 캠핑카. 그녀는 얼마 전 그녀의 남편을 잃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들 부부가 여생을 고민하지도 않았을 어떤 시점에서는 그들 딸 스테이시를 먼저 떠난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 죽은 그들의 딸을 언급하는 것조차 그들 노부부에겐 고통이었을 텐데, 노마 할머니는 생의 끄트머리 어딘가에서 죽은 딸 스테이시를 담담하게 맞이한다. "나는 지금 스테이시의 물을 마시고 있거든"(p.300).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온 팀과 라미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듯이 살아오면서 당신들의 어머니 노마도 자유롭게 세상을 떠나보낸다. 그들답다. 그럼에도 이건 전적으로 노마 할머니의 선택이란 것이 여간 감동을 넘어선 게 아니다. 여기에 링고까지 그들 가족은 미국을 떠돈다. 그냥 세상을 떠날 수 없기에, 떠나보낼 수 없기에 의기투합을 하는데, 그때부터 그들에게 신나는 축제가 펼쳐진다. 이건 누구든 알고 있는,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잘 마감할지 아니 마감되었는지, 이걸 행운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진짜 계획 없이 찾아온 것이지만.


이 책을 언제 읽었는지 기억에 없다. 그럼에도 지금 읽었을 때 더 감동으로 다가온 건 분명 이유가 있다. 그때 읽었을 때보다 지금 읽는 순간이 더 가슴이 아픈 건 그때 보다 조금 더 세상을 살았기보다, 내 주머니 속 남은 달력의 날짜가 줄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누구든 살아갈 날짜는 줄어드니 공평하기에 불만이 없지만, 처음 어머니를 떠나보낼 땐 주저주저했다. 어머니의 병명에 대해서도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서도 감히 입에 달지 못했다. 그저 초초한 마음뿐이었지만. 이젠 달라질 것 같다. 달라져야만 한다. 이 책을 그저 죽음을 어떻게 보내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가벼운 마음으로 아버지께 권했을 뿐인데, 마음이 무거워지고 생각이 많아진 건 심부전이란 병명 때문이었다.


지금 아버지도 심부전이란 유쾌하지 않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와 있기에...... 어떻게 대할 것인가? 죽음을 말이다.


노마 할머니남편 레오의 딸과 아들인 스테이시와 팀은 그들이 낳은 자식들이 아니다. 입양한 자식들인데, 어쩜 그래서인지 책이 주는 감동이 더 컸던 것 같다. 직접 낳지 않았어도 그들이 갖는 애틋함은 서구 사회에 대해 갖는 편견을 날려버린다. 기른 정! 자기 용기를 과신하려 남을 쉽게 죽이는 정신 나간 오늘날, 자기 자식을 아파트 밖으로 던져 버리는 비정한 세상에서 이들이 전하는 온기 조금이라도 우리들 거칠어진 마음속에 전달되었으면 한다.


따듯한 마음, 따듯한 세상!  오늘 쫌 감상적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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