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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Jan 01. 2024

키커도 불안 한데...

페터 한트케(2009).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페널티킥 상황. 골키퍼가 골을 막지 못해서 얻는 욕보다 키커가 골을 넣지 못해서 얻는 욕이 더 클 것 같다. 이건 키커가 찬 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갈 확률이 더 높아서였을 텐데, 막는 골키퍼는 골을 막지 못해 얻게 될 욕보다 골대 앞에 서야 한다는 불안감이 더 부담스러울 것 같다. 어쩔 수 없음. 골키퍼니까 골을 막아야 한다는 숙명. 승부는 순간 결정이 되는데 그 순간이 순간이 아니라고 느껴진다면?


요제프 블로흐. 건축현장에서 일하는 조립공인 그는 한때 잘 나가는 골키퍼였다. 골을 막는 직업. 그에게 벌어지는 앞날을 막지 못함은 그가 인생에선 유능한 인생 키퍼는 아니기 때문이다. 공사현장에서 조금 늦게 출근했으니, 누군가 흘끗 쳐다볼 수 있는데 이걸 그는 과잉 해석했다. 이를 현장감독이 자신을 해고한 것으로 받아들이다니. 그럴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럴 수 없게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버렸다. 시작은 이렇게 된 것이다.


과잉해석과 행동. 이건 전적으로 블로흐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한때 잘 나가는 골키퍼에서 이제 평범한 노동자로 변신한 그 자체가 모든 걸 설명해 줄 수는 없다. 대게 그렇게 살아갈 텐데 이렇게 된 건 주인공 블로흐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묻지를 마라. 소설에선 인과관계를 묻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를 해고해서 벗어난 일터 밖은 정서 상태가 안정적이지 않은 블로흐를 역시나 품어주지 않는다. 


어두운 극장과 카페, 술집을 들락거려도 그는 어느 곳에서도 심적 안정을 느끼지 못한다. 언 듯 언 듯 나타나는 공중전화는 그를 세상과 연결시켜주지 않고, 한때같이 살았던 전처와도 관계가 이어지지 않는다. 여기저기 낯선 이들과의 대화도 겉돌기 일쑤고 그는 도시 어느 곳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한다. 이런 심리적 불안감은 잠시 알게 된 극장 매표소 안내원과의 관계에서 폭발하고 만다. 같이 하룻밤을 보내고 그저 그녀 입에서 일하러 가지 않냐고 말한 그 말 때문에 우발적으로 그녀를 죽여버린다. 


누군가를 죽였으니 주인공 블로흐가 느꼈을 불안감과 두려움은 키커를 앞에 둔 골키퍼의 운명보다 훨씬 더 가혹하지만 역설적으로 블로흐가 느끼는 체포에 대한 두려움은 크게 그려지지 않는다. 경찰이 자기를 잡으러 올 것이란 두려움보다 그가 경찰을 피해 국경 마을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면서 느끼는 강박, 스스로 만들어내는 강박을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의 모습이야말로 작가가 말하는 바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고. 골키퍼야 그게 페널티킥이라도 그건 순간일 텐데, 주인공 블로흐가 느끼는 불안함은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이라고. 사실 첫 문장부터 소설 마지막 문장까지 자신을 옭아매는 정서 상태가 바로 현대 사회이니까. 


다시 축구 얘기다. 월드컵 결승전. 연장전까지 승부가 나지 않아 승부차기로 승부를 내게 되었다. 승부는 어떻게든 나는데, 골키퍼가 골을 잘 막아서 이겼을까? 아니면 키커가 골을 잘 넣어서 이겼을까? 골키퍼가 골을 잘 막아내고 키커는 골을 잘 넣으면 게임을 이기는데, 이를 선수들이 다 알면서도 실전에서 이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런 관계로 이뤄진 건 틀림없는 사실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를 알면서도 축구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 경기라는 것이 참 쉽지 않다. 항상 이길 수가 없으니. 승부는 어떻게든 나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것이 어느 순간엔 내가 키커도 되고 키퍼도 되니까. 그러기에 어떻게든 불안감은 상존할 수밖에 없거늘! 


소설을 읽는 내내 문장은 곤혹스럽다. 특별히 의미가 있다고 보기에 그냥 그런 문장들이 반복되는데, 이건 작가가 보여주는 현대사회의 소외, 단절, 불안을 묘사한다. 그럼에도 그 와중에 얻어진 위안은 하나 있었다. 그건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느꼈을 감정들을 글로 썼을 때 이렇게 묘사될 수 있음에도 이렇게 묘사하지 않았다는 사실. 묘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였을 거지만, 작가란 도처에 널려있는 글 쓸 거리를 기가 막히게 포착하는 사람들이란 사실 하나는 배운 것 같다.  다 같은 세상을 사는데 말이다. 누군 그걸 바라보고 느끼고 말로 남기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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