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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Mar 01. 2024

거식증과 대식증 사이.

이상운(2011). 내 머릿속의 개들. 문학동네

화이트 코미디란 말이 있던가? 블랙코미디라는 말은 있다. 세상에 대한 냉소와 경멸을 표현하는 드라마 형식인데, 문학에서 굳이 이를 연결시키면 부조리 문학이 될 것 같다. 그럼 이 책은 부조리 문학이어야 하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이유인즉, 전체적으로 희극처럼 느껴져서 그렇다. 소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대화체 문장이다. 비참한 면도 있어 희비극으로 불려도 무난할 것 같으나 결론이 비극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것도 같다. 그럼 뭐지 이 소설?


기발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까 하다가 제5도살장을 쓴 커트 보니것이 생각났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같은 종족 같다. 재미로 읽기에는 묵직한 한방이 실려 있다. 심각하게 읽기에는 실소가 나온다. 연극으로 치면 소극(笑劇) 같은데, 결론은 슬프다. 그럼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 이 작품으로 작가 이상운은 2006년에 제11회 문학동네 작가 상을 받았다는데, 그랬기에 더 대중에 소구 된 것은 맞지만 꼭 그것 때문에 이 작품이 더 빛나는 것 같지는 않다. 상을 받지 않았어도 군계일학 같은 소설이다. 소설!


이렇게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패한 혹은 패배한 자를 그릴 수 있다니. 작가가 세상을 보는 눈이 비수 같다. 무게 120kg이나 되는 여자와 존재 A인 남자. 여기서 존재 A는 현재 실업자인 사람을 말하고 그가 말하는 존재 B는 조만간 실업자가 될 사람을 말하는데, 세상에는 이 두 가지 부류의 사람밖에 없다. 그럼 난 뭐지? 어떻게든 살다 보면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걸릴 것 같은데, 그의 통찰력이 참 가관이다. 존재 A 고달수는 이름처럼 고달프게 살아간다. 백수다. 그 백수가 어느 날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다. 물론, 썩은 동아줄이다. 


시대 배경이 IMF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이 요동칠 때 이런 파고에 휩쓸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겠지만 그중에 고달수가 있다. 동아줄이란 대학 동창이면서 유명한 설치미술가 겸 팝 아티스트 마동수로부터 어느 날 연락이 온다. 취업 제안? 백수를 벗어날 절호의 기회가 될까만은 아내를 꼬셔 이혼하게 만들면 1천만을 주겠다는. 지금 생각하면 껌 값이겠지만, 그렇다고 그 금액만큼 껌 사서 씹지 마시라. 지금 금액으로 환산하면 엄청난 껌이 되시겠다.  


마동수 아내 장말희는 의부증 환자인데 도가 심해서 설탕중독에 빠진 상태다. 남편 따라 유학 가서 완전히 거대한 여성으로 돌아온다. 이 정도면 남편이 이해가 되기도 할 텐데, 수컷 입장에선 뚱뚱한 여성과 멋진 '관계"가 그려지지 않는다. 아마, 이것이 마동수가 가장 꺼리는 요인인데 이건 남편에게 '미학적 교환가치가 전혀 없는' 여성과 사는 것이 된다. 왜냐면, 그는 미술가 예술가니까. 이건 남편의 본성(sex)을 건드린다.  


고달수는 자본주의 마약 돈에 취하고자 장말희에 접근을 하는데, 대화가 참 그로테스크(상상 보시라!!)하다. "우린 참..." "네?" "마음이 잘 통하는 것 같아요." "아, 네. 정말 그렇군요, 말희 씨." 고달수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매번 머릿속의 개들을 쫓아내려 하는데, 이때는 정신이 말짱했나 보다. 뚱뚱한 여자는 그만큼 위력적인가?? 아니면 도덕적인 회의와 돈 때문이라는 자괴감, 여기에 성공했기에 적대적이기도 한 마동수를 향해 분노를 날리지만. 


고달수와 마동수의 대화를 보면 정말 촌철살인 같다. 마동수가 자기 아내와의 결혼을 "고도의 생산성이 보장된 탁월한 합병"이라던가 말희와의 이혼을 "구조조정"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이건 틀림없이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 여기서 마동수 직업이 주는 바가 크다. 소비 사회를 상징하기 위해 폐품으로 작품을 만드는 설치미술가. 나중에 자기가 설치한 작품에 깔려 죽지만, 이건 고달수의 작업인 것 같지만, 인간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뭔가를 소비해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하는 대목들은 이 소설이 갖는 백미일 것 같다. 


"내 영혼은 너무 추워서 이젠 이 두꺼운 살을 벗어날 수 없어요"라는 장말희를 보면서 고달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작업은 원활하게 진행되듯 하다가 달수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장말희에게 고백을 한다. 이건 작업이었다고. 이에 당연히 장말희는 달수를 떠났는데, 어느 날 장말희를 돌보던 노파로부터 장말희가 거식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식증에서 거식증이라니. 


여전히 머릿속에선 개들이 뛰쳐나가는 고달수에게 마동수가 보낸 이들로부터 폭행까지 당하자 마동수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이 지나쳐 개들로부터 계시를 받게 된다. 개들에게 붙잡혀 그도 뚱보가 되는 꿈을 개과천선의 기회로 받들어 그도 뚱보가 되기로 결심하고 진짜 뚱보가 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동수가 죽자 그의 장례식에 찾아가 장말희를 만난다. 같은 동지애로 여전히 뚱뚱해져야 할 장말희는 오히려 반대로 날씬해져 있음을 발견한다. 존재가 달라진 말희 입장에서 고달수가 얼마나 어리숙하게 보였을까? 그녀가 썩소를 날리자 심약한 고달수는 처음 그녀에게 보냈던 그의 썩소를 생각하며 머릿속 개들을 밖으로 던져버린다. 머릿속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개들이 있을는지 모르면서.


생각해 보면 작가 머릿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 개들 덕분에 이 소설이 완성된 것 같다. 이건, 작가가 고달수처럼 살(?) 찌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이지만, 장말희와의 재회, 그녀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무위로 끝나는 건 마음이 편치 않다. 우린 어쩌면 거식증과 대식증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열심히 머릿속에 개들을 뽑아내며 사는 건 맞는 것 같긴 한데, 소비 만능과 물질주의를 완전히 쫓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못하는 그 사이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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