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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Mar 10. 2024

'다녀오겠습니다.' 어딜?

신카이 마코토(2023). 스즈메의 문단속. 대원씨아이.

일본 소설은 힘이 센 것 같다. 아주 다양한 주제들을 작가들이 다루니까. 지진과 관련된 소설까지. 소설? 이거 소설인데 좀 이상하다. 이건 2022년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소설로 만든(?) 것이다. 보통 소설을 기반으로 영화를 만드는 데, 이건 그 반대다. 작가가 쓴 다른 책들을 보니 자기가 만든 영화와 같은 제목으로 소설을 다 만들었다. 이 말인즉, 작가는 자기가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를 다시 소설로 재구성했는데, 그래서일까? 책의 전개가 매우 매끄럽다. 정말, 소설을 읽는데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영화를 제대로 본 기억이 없는데 어디서 본 것 같다. 역시나 영화? 

언젠가 영화를 소개해 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본 것이다. 당연히 그때 일본에서 엄청난 성과를 낸 작품이라서 국내 개봉을 앞두고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다루었을 테니. 그 덕분일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소설인지 영화인지 헷갈렸을 것이다. 그러니 소설 속 상상이 쉽게 현실처럼 여겨졌다. 이런 느낌도 처음이다. 그가 쓴 다른 책들 제목을 다시 보니 《날씨의 아이》, 《너의 이름은》 등 모두 어디서 들은 이름이다. 역시나 작가가 만든 영화가 엄청 성공해서 역시나 텔레비전 영화 소개 프로그램들에서 다뤘던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섭렵하지 못했는데도 알 정도라면. 영화관 가서 영화 보는 걸 귀찮아하니 선택한 대안인데, 이것이 그리 나쁜 것 같지 않다. 대강 줄거리 정도는 알게 되니까..

영화가 엄청난 티켓 파워를 보여준 작품답게 소설 내용이 매끄러운 건 역시나 영화를 만들면서 작가가 들인 노력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기획을 3개월 동안 준비하고 각본은 5개월 걸쳐서 썼다고. 여기에 콘티는 15개월 걸렸다고 하니, 이 소설이 주는 완성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말이다. 영화가 준 성공으로 소설까지 성공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설을 소설로 읽으면서도 영화 같은 장면들이 떠오른 건 당연히 감독이자 작가의 역량이지만. 굳이 일본 소설은 쎄 드라고 한 건 다른 이유들 때문이다.  

대게, 일본에서 공전의 히트작들은 장르를 불문하고 우리에게 빠르게 전달된다. 출판계 사정을 잘 모르지만. 우리 독자들에게 전달된다고 독자들이 다 좋다고 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몇 편 읽은 일본 소설들은 다 재미있었다. 최근에 읽은 소설들을 중심으로 열거해 보면, 《그래도 우리의 나날》,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 《반짝반짝 빛나는》... 등등. 한국인이라서 같은 한국인이 쓴 소설을 읽으면 바로 흡수되는데, 때론 소재의 빈곤이랄까 그렇게 느껴져 다양한 주제를 원하게 될 때 일본 소설은 아주 괜찮은 선택지 중 하나이다. 다행히 출판사들이 적절하게 알아서 출판을 해주니까, 그저 편안히 책을 골라 읽으면 된다. 그런 일본 소설을 읽을 때 일본 소설이 정말 다루는 주제가 다양하고 꼼꼼하며 내용이 꽉 찬 느낌을 들 때가 많았다.  이거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데, 가볍게 읽히는 것 같지만, 읽고 나면 뭔가 가슴에 다가오는 무언가. 

스즈메, 소타, 타마키, 다이진, 사다이진이 주요 등장인물, 은 아니구나. 고양이도 있으니.  아, 하나 더. 의자. 다리가 3개인 어린이 의자. 내용은, 대지진의 전조 미미즈가 문을 열고 나타나면 이걸 닫아야 하는 역할을 소타가 해왔는데, 어느 날 스즈메가 이 숭고한 사건에 개입하게 된다. 우연히. 주인공이 그렇게 등장하는데, 그 과정 속에 스즈메가 요석을 위로 들면서, 요석이 미미즈를 막고 있었는데, 이걸 해제했으니 얘기가 복잡해진다. 요석은 미미즈를 틀어막는 병뚜껑 같은 역할이기에 이 요석을 다시 막으려고 하는데, 그 요석 중 하나가 고양이 다이진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니 스즈메와 소타가 다이진을 잡아 미미즈를 안정화시켜려 한다. 잡으려는 다이진은 잡히지 않고 다이진을 잡는 여정 중에 미미즈가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을 해코지하려 한다. 소설 후반에 세상엔 요석이 딱 2개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 다른 하나가 고양이 사다이진이다. 얘는 언제 변신했더라? 이 고양이가 스즈메와 다이진과 함께 미미지를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요석이 요석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지진이 시도 때도 없이 예고 없이 나지만 전조는 있기 마련, 그게 미미즈인데 미미즈를 막는다는 것이 결국 지진을 막는 것이니까 주인공 스즈메와 소타가 이를 막으려 좌충우돌하는 내용이 소설의 전부다. 그 와중에 소타는 미미즈를 막으려다 의자로 변하고 결국엔 저승에 묻히게 된다. 구해주지 않으면 소타는 다리 3개 의자로 저승에서 차갑게 변해 이승으로 넘어오지 못한다. 방법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문을 열고 가야 하는데, 이 문이란 상징이 미미즈를 막는 의미이기도 하니. 그래서 소설 제목이 문단속이 되는 건데, 이러니 소설 내용이 가볍지 않게 된다. 문을 단속하는 건 미미즈를 막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지만, 문을 닫고 있으면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없으니 문이 주는 은유가 가볍지 않다. 참고로 원한다고 다른 세상에 갈 수 없다. 이건 저승이니까. 아주 다른 세계. 문밖의 세계는 저승의 세계. 아무나 갈 수 없고 갔다면 돌아올 수 없는. 

스즈메는 어릴 때 엄마가 죽는데, 그런 그녀를 이모 타마키가 돌봐주게 된 것이고, 그녀를 보호하려 소설 속에서 엄마와 같은 이모도 길을 떠나게 되는데,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은 로드무비 아니 로드 소설이다. 길에서 뭔가 사건이 벌어지고 전개되고 마무리된다. 이렇게 소설은 5일 동안 벌어지는 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어린 스즈메는 아주 어렸을 적 문을 넘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먼 옛날의 스즈메를 현재의 스즈메가 만난다. 이건 영화가 아닌 소설이라 더 감동적인데, 다행히 스미즈는 미미즈를 막으며 확실하게 문단속을 한다. 그래서 제목이 스즈메의 문단속인 것이다.

사실, 영화라고 해도 소설이라도 배경은 그리 밝지 않다. 일본인의 1/3 정도만 기억한다는 동일본 대지진. 우리에겐 그저 거대한 쓰나미만 기억할 뿐. 아니다. 후쿠시마 원전과 누출된 방사능으로 우리 먹거리까지 논란을 여전히 만들고 있는 그 사건을 기초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엄청난 지진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상처를 받고, 남는 건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한 연가와 기억을 해주는 것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 그래서였을 것이다. 스즈메는 결과적으로 가출을 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것 때문에 이모 타마키가 모든 것 다 제쳐두고 스즈메를 찾으러 다니지만, 이런 애틋함 보다 소설이 읽으면서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건 결정적으로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문장 때문이다. 가출했다면 안녕히 계세요 하던가 다음에 봬요가 될 텐데 '다녀오겠습니다'이다. 이건 5일 이후 6일째와 그 훗날을 암시하는 것으로, 다행이다. 결과가 어떻게 날지 예상했어도 다행이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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