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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Mar 15. 2024

소설은 힘이 세다.

한강(2022).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작가는 자기가 쓴 소설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고 했는 데 성공했을까? 작가가 말한 지극한 사랑이 뭐지?라는 질문 이전에 내가 산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게 심해서 집중력 장애까지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악몽이 발화되어 꿈인지 생시인지, 죽은 새 마가 다시 등장하고 서울에 있어야 하는 친구 인선이 나타나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풀어나간다.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꿈이었으면 좋으련만. 그나저나 가해자는 당연히 말이 없고, 피해자는 잊을 수가 없으니. 잊히는 것이 아니라 작별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그 작별이란 것이.


통칭해서 제주 4·3 사건이라고 부르는, 광주에서 벌어진 만행은 피해자가 적극 나서 가해와 피해를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으련만. 이건 가해자의 일부도 언제가 피해자(서북청년단 등)였기에, 그 광기를 펼쳐 피해자의 아픔을 자꾸만 늘려나갔으니. 그렇다고 가해와 피해의 간극이 명확하지 않은 건 아니었음에도 우리 역사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일까? 우리 손으로 직접 해낸 해방이 아니었기에, 그 생채기는 두고두고 우리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작가가 소설을 쓴 이유 말이다.    


책을 읽고 인터넷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여러 장의 사진을 찾아 유심히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상처로 얼룩진 우리 근현대사가 쓱 하고 지나갔다. 그중에서 1948년 제주도 중산간지대로 대피한 어린이들 사진을 보는데 더 이상 나가지 못했다. 유독 그 사진에서 멈춘 이유가 뭘까? 이 아득함이란! 그때 그곳에 있었고 아직도 우리가 같이 사는 세상 이곳에 누군가는 남아 살았다면 살아있을 나이. 그들이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조차 물어보기 어려운, 아니 그들도 그저 뭐가 뭔지도 모르고 보냈을 아픔. 시대가 준 상처이기에 시간이 가면 나으련만, 그 상처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인선이 사고로 절단된 후 봉합된 손가락 신경이 죽지 않도록 찔러대는 바늘처럼 여전히 우리를 아프게 하는데, 그럼에도 내게 벌어진 일이 아니라서 무심하게 지나쳤던, 그러니 작별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다짐.


학살에 대한 책을 냈기 때문인지 평소에 악몽에 시달리던 경하는 어느 날 친구 인선의 전화를 받는다. "지금 와줄 수 있어"라는 문자. 인선은 제주도 공방에서 작업을 하다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해 서울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병원에 와달라는 부탁. 그건 자기 집에 남아있는 새 아마가 죽을 수도 있으니 돌봐달라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경하는 우리에게 잊혀갔던 암울한 역사와 마주치게 된다. 눈이 너무 많이 와 대중교통편마저 다 끊긴 제주도 인선의 집에서 꿈인지 현실인지, 과거인지 현실인지 오가면서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거나 잊었던 사람들과 그들이 겪었던 상처로 그녀를 깊숙이 끌고 가는데, 가보니 그곳엔 인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겪은 고통이 똬리고 있었다.


소설을 읽는데 집중하기 어려웠던 점은 죽은 새 아마가 다시 살아나고, 병원에서 그녀 부모가 겼었을 고통 같은 손가락 절단 사고를 당한 인선이 나타나 경하에게 그녀 어머니가 죽기 전까지 어떻게 고통 속에서 살아왔는지, 이를 어떻게든 극복하려 했던 인고의 시간들이 정신없이 오갔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소설과는 다른, 그렇다고 전체 흐름이 오롯이 전달되는, 아픔까지 함께, 어쩜 이것이 소설이 주는 '힘' 인지 모르겠다. 소설이기에 시간과 장소를, 상식과 사실을 넘나들며 잊히지 않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는지. 역사가 주는 상처와 살아남은 자들이 겪는 고통을 온전하게 전달했기에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과 에밀 기메 문학상을 수상케 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칠십 년 동안, 그게 친구 인선의 어머니 정심이 죽기 전까지 부여잡은 숙제라면, 그 숙제는 여전히 밀린 채로 남겨졌지만, 이런 일이 우리에게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각인시켜 준 소설. 어느 날 왜 죽는지 명확히 알지도 못하고 죽은 많은 사람들과 그들 대부분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어머니였고 아들과 딸이었다는 사실. 이걸 친구 인선을 통해 경하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것만으로도 감동할 수밖에 없는 소설. 이러니 소설은 힘이 세다.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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