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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Apr 01. 2024

소녀는 지금 어떻게 컸을까?

클레어 키건(2023). 맡겨진 소녀. 다산북스.

소녀는 지금 어떻게 컸을까? 이런 말 같지 않은 말을 하다니. 어떻게 컸을 거라니? 잘 컸겠지! 엄마가 자기를 낳은 것처럼 누군가를 낳고 잘 살아가겠지. 이렇게 말해도 해갈이 되지 않고 자꾸 갈증이 목을 타고 올라온다. 짜증이 포함된 갈증이라니.


하다만 것 같이, 잔뜩 듣고 싶은 알고 싶은 열망만 키운 채 탁 끊긴 소설. 마음이 종잡을 수 없게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뭘까? 이 정체는. 궁금했다. 정말 탈 없이 잘 커주기를, 잘 컸으면 하는 바람. 상처받지 않고. 어쩜 소녀는 역설적이게 '상처'가 뭔지 알게 된 건 아닌지. 그러니 더 슬프기도 하다. 


부활이 부른 노래 네버엔딩스토리(naver ending story)가 있다. 워낙 유명한 곡인데, 이곡을 좋아하느냐를 떠나서 이 제목이 떠오른 건 끝나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소설이 끝날 수 아니 끝낼 수 없는 소설이란 것이 가당치 않지만, 이 소설만큼은 주인공 소녀가 이후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좀 더 독자를 위한다면 작가 클레어 키건이 후속작을 써줬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 소설. 분량으로 보면 중편 같은데, 작가는 단편의 호흡으로 써서 단편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건 중요하지 않다. 


그룹 부활처럼 아일랜드에선 아주 유명한 작가, 미국을 거쳐 우리에게까지 전달될 정도로 명성이 높아진 것일까? 어떻게 이 작가가 독자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내용이 엄청난 플롯으로 구성된 것도 아니고,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들이 극적이지도 않다. 굳이 소설에서 뭘 말할까 되짚어봐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소설을 기초로 만들어진 영화 제목이 '말 없는 소녀'이다. 동양화 같기도 수채화 같기도 하고, 여백이 아주 많아 이야기로 가득 찬 내용을 원하는 사람은 이게 뭘까, 하고 생각해 보게 만든. 그런데 어떻게든 끝을 알고 싶게 만드는 강렬함이라니! 소설은 끝났지만. 


여기 한 소녀가 있다. 가난한 집에 다자녀 중 한 명인데, 엄마가 또 아이를 임신한다. 무뚝뚝한 아버지와 항상 바쁜 엄마로 인해 애들 양육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그 많은 자식들 중에서 왜 그 소녀만 엄마의 먼 친척 킨셀라 부부에게 잠시 맡겨야 하는지. 이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벌인 행동들에 인과관계를 생각해보면, 얼마나 설명할 수 있는지. 사는 건 어쩜 그냥 사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러니 작가 클레어 키건은 세상살이가 뭔지 익히 다 알아버린 사람일 것 같다. 그래서일까? 작가 생활 24년 동안 단 4권의 책을 쓴, 그런데 주옥같은 책 들이라는 평판이 자자하다니. 정말, 자자할 것 같다!


딸을 뭔 곳으로 임시 입양(foster)을 보내는 부모 마음은 전달되지 않는다. 모두 예상할 것 같은 소녀가 앞으로 알게 될 그 상처란 '사랑과 다정함을 알아버린 것일 텐데, 그로 인해 아파지는 마음 못지않게 작가가 어떻게 그 어린 소녀가 되어 우리에게 그 '세밀한 마음'을 언어로 전달시키는지, 그것이 이 작가가 명성을 얻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어쩜 거장이란 것이 이런 것일까? 문장 하나하나를 그냥 보낼 수 없다. 분량으로만 생각하면 후딱 읽어버린 소설이지만, 문장 하나하나 집중하다 보면 그냥 흘려버릴 수 없기에 마음이 종잡을 수 없게 된다. 말이 적어서 오는 감동이라니. 시도 아니고 소설인데 말이다. 


약속된 시간, 엄마가 출산을 한 후 소녀는 집으로 다시 보내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처럼 나이 많은 가짜 부모랑 여기서 영영 살 수는 없잖아. ˝ 아니, 킨셀라 부부도 같이 살았으면 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들 아들을 저세상으로 보냈기에. 소녀도 우연히 그들 부부가 겪었을 고통을 알 것 같기에 이 말을 듣고 소녀는 말한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불을 빤히 보면서 울지 않으려고 애쓴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고, 그래서 지금 울음을 참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다."


그렇게 소녀는 집으로 돌아오고, 소녀를 바래다준 킨셀라 부부는 떠나는데 이를 바라보는 소녀의 표정이라니. 표정이 보일까 싶지만, 엄마는 알아차린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 차가 떠나고 나서 엄마가 말한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 내가 말한다. ˝말해. ˝ ˝아무 일도 없었어요. ˝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묻고 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


이렇게 소설이 끝날 것만 같은데, "자갈 진입로에서 자동차가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나는 선 자세에서 곧장 출발하여 진입로를 달려 내려간다. 심장이 가슴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속을 스친다."  


그렇게 달려가 아저씨 품에 안기고, 옆에서 들리는 아주머니 울음소리까지. 자기를 자상하게 보살펴준 킨셀라 부부에게 배운 것처럼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입을 다물기 딱 좋아야 할 순간이기에 입을 다물려고 하는데, 멀리서 지팡이를 들고 다가오는 아버지가 보인다. 소설 중에서 유일하게 독자를 긴장시키는 장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때 소녀가 선택한, 입을 다물기 딱 좋아야 할 순간에 소녀는 절대로 말하지 않아야 할 때는 하지 않아야 한다는 금기를 깨고 한 말은.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라고.  


그렇게 빛났던 여름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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